北, 뒷돈요구-대금 착복 일쑤…항의하면 “간첩”

  • 입력 2006년 9월 15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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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농수산물을 수입하던 무역업자 L 씨는 2004년 북한 농산물을 수입하려다 낭패를 본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한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북한 측 인사에게서 “정상가보다 50%가량 비싸게 물량을 사 주면 특정 농산물의 수입 독점권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아들인 게 화근이었다. L 씨는 샘플만 확인하고 계약했다. 배편을 통해 물건을 받아 보니 제값을 받기 어려운 저질 제품이었다. 분을 삭이고 독점 판매권을 요청했지만 북측은 다시 3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요구했다. 그가 거액을 지불하고 따낸 수입 독점권은 곧 무용지물이 됐다. 4개월여 만에 북측이 다른 남한 업체에 해당 농산물 판매권을 넘겨 준 것이다. “북측에 항의도 많이 했는데 다 소용없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서 우기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돈벼락을 기대했던 제 잘못이 더 큰 거죠.》

대박의 꿈을 안고 북한에 진출한 우리 기업인들이 도산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에 진출했던 기업 중 500여 곳이 이미 사업을 접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에 투자한 남측 기업인들은 “북한 당국의 ‘제멋대로 식’ 관리를 방치했다가는 머지않아 대북 사업의 씨가 마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력 제멋대로 배치 등 파행 운영

남북 경제협력 사업은 남측의 기술과 북한의 싼 토지, 저임금 노동력이 결합되면 경쟁력이 높은 제품을 만들 수 있어 이론적으로는 매력적이다. 또 북한의 농수산물을 싸게 들여오면 이윤도 많이 남길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중소기업이 대북 사업을 새로운 기회로 여기고 큰 관심을 보여 왔다. 중국과 농수산물 무역을 하는 업체들도 거래처를 북한으로 돌리기 위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하지만 대북 사업 가운데 성공 사례가 보고된 적은 거의 없다. 평양에 진출해 있는 엘칸토와 2004년 이후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들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업이 적자에 허덕이거나 문을 닫았다.

북한에 투자한 기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북한은 남측이 기술력을 발휘할 여건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남측 기업인들이 마음대로 공장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인력도 제멋대로 배치한다. 한마디로 공장 운영의 자율권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거래대금도 떼먹기 일쑤다.

남한 기업인의 관리가 소홀해지면 제품 경쟁력이 떨어지고, 거래처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다. 북한에 진출한 기업 중 규모가 비교적 큰 E사, I사, G사, S사, D사 등도 파행 운영되다 북한에 공장을 빼앗기거나 사업을 철수했다.

○ 북한 당국 “내 말이 곧 법이다”

대북 사업의 공식 창구는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로 단일화돼 있다. 민경련은 1998년 북한이 만든 조직으로 중국 베이징(北京)과 단둥(丹東)에 지부를 두고 남한 기업의 북한 진출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남측 기업인들은 “민경련은 남측 기업인을 ‘봉’으로 여기며 돈을 챙긴 뒤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리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평양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H 씨는 “민경련은 처음에는 ‘모든 것’을 해 줄 것처럼 말하며 계속 뒷돈을 챙겨 가지만 정작 중요한 시점에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며 “독점 사업권을 미끼로 수만∼수십만 달러를 챙겨 놓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전했다.

현대그룹과의 사업을 총괄하는 북한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가 최근 개성 골프장 사업권을 4000만 달러를 받고 중소 건설업체와 이중 계약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또 민경련은 초청장 발급 권한을 활용해 남측 기업인을 통제하고 있다. 뒷돈을 선뜻 내놓지 않거나 북한 사정에 밝은 기업인들에게는 초청장을 발급하지 않아 사실상 그들의 사업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7년간 대북 사업을 해 오고 있는 Y 씨는 “사업권 문제로 민경련과 다툰 뒤 3개월 이상 초청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제는 ‘국가정보원의 끄나풀’이라며 간첩 취급을 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잘못된 관행 안 고치면 대북사업 전멸”

북한에 투자했던 기업들은 그동안 정부와 현대 대우 등 일부 대기업이 북한의 버릇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대북 사업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면서 ‘뒷돈 없이는 사업도 없다’는 공식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김대중 정부가 현대를 통해 북한에 4억5000만 달러를 불법 송금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15년간 대북 사업을 해 왔다는 한 기업인은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중국에서 북측 인사를 만나면 밥도 샀는데 2000년 이후에는 남측 사람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며 “지금은 조그만 일에도 뒷돈이 들어가지 않으면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북한에 진출한 대다수 기업인은 북한 당국과의 뒷거래 관행을 청산하고 새로운 경협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기업인들은 “정부가 미국에만 할 말을 할 게 아니라 북한에 할 말을 더 제대로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한 대북 사업가는 “북한 당국의 잘못된 관행을 근절하지 않으면 5년 내 개성공단을 제외한 대북 사업은 전멸할 수도 있다”며 “북한에서 망한 기업들의 사례를 분석해 더는 피해 기업이 나오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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