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대통령의 세계일주

  • 입력 2006년 5월 1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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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사흘간 29번째 국가를 방문했다. 지금은 30번째 국가에 머물고 있다. 내일부턴 31번째 국가 방문이 시작된다.

몽골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순방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다. 취임 3년여 만에 정상 외교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았으니 대단한 기록이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4강은 물론 유럽 아시아 그리고 머나먼 중남미와 아프리카까지 골고루 방문했다.

정상 외교는 외교의 꽃이다. 외교 역량을 총동원해 현안을 해결하고 국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다. 이번 순방만 해도 몽골은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 아제르바이잔과 아랍에미리트는 한국 국가원수로서는 첫 방문이다. 희소성까지 곁들여졌으니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정상 외교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대통령이 훑고 지나가며 모든 숙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한 차례 정상회담으로 한국과 상대국이 둘도 없는 맹방이 되는 기적도 생기지 않는다. 정부는 성과를 풍선처럼 부풀리고 싶겠지만 안목 있는 국민은 넘어가지 않는다.

한번 따져 보자. 노 대통령은 3월 나이지리아를 방문했다. 정부는 2개 유전의 우선개발권을 확보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성과는 성과다. 그런데 나이지리아는 한국만 바라보지 않는다.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미래가 탄탄대로에 들어섰다고 설명하면 터무니없는 비약이다.

노 대통령의 방문 한 달 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나이지리아를 찾았다. 후 주석은 나이지리아로부터 4개의 해상 유전 개발권을 얻어 냈다.

양국이 거둔 성과는 유전의 규모로 비교할 수 있다. 한국이 확보한 유전 개발권의 낙찰가는 1억 달러였다. 중국은 유전 개발권을 얻기 위해 23억 달러를 지불했다. 개발권 가격 차이만큼 유전의 규모에도 차이가 날 것이다. 똑같은 정상 외교였지만 국력에 따라 이렇게 성과가 달라진다.

국제무대에서 국력의 차이를 보완할 수 있는 능력이 외교력이다. 참여정부의 정상 외교도 이제는 선택과 집중을 생각할 때가 됐다. 임기 말까지 지구상에 남아 있는 국가를 찾아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게 목표가 아니라면 정상 외교의 핵심 목표에 진력할 때가 됐다.

한국 외교의 중심축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변 4강과의 관계다. 노 대통령도 그래서 임기 초 차례대로 4강을 순방했으리라. 그런데 현재 4강과의 관계는 어떤가.

미국과는 날이 갈수록 불협화음이 커지고 일본과는 등을 돌린 형국이다. 청와대가 한미 정상의 친밀도를 보여 주는 척도라고 자랑하던 ‘노-부시 전화 외교’도 사라진 지 오래다. 중국과 러시아는 여전히 우방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이웃에 불과하다. 4강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6자회담은 빈사상태에 빠졌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보자. 그는 벌써 두 차례나 미국을 방문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경칭을 생략하고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가 됐다. 지난주 메르켈 총리를 맞은 부시 대통령은 “헬로, 엔젤라”라고 인사한 뒤 백악관 내 명소를 직접 안내했다고 한다. 메르켈 총리의 정상 외교 덕분에 전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시절 험악했던 미독(美獨) 사이에는 대번에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과 일본을 ‘최고의 우방’으로 만든 원동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정상 외교력이다.

오랜 외국 생활에 태극기만 봐도 눈물이 나는 교민들의 박수소리에 취하고, 고만고만한 나라를 찾아가 화려한 의전 행사를 즐기는 건 쉬운 일이다. 반면 서먹해진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정상 외교가 갈 길은 어려운 쪽이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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