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김정일 친서’ “美, 나쁜 행동엔 보상없다며 묵살”

  • 입력 2005년 6월 24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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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북-미 간 대화채널 개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북한이 백악관에 보내는 김정일의 친서를 만들었다.”

그레그(아시아 소사이어티 회장) 전 대사와 함께 2002년 11월 평양을 방문했던 돈 오버도퍼 미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23일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으로부터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친서를 받아 백악관에 전달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레그 전 대사와 오버도퍼 교수는 전날 ‘북한을 붙들 순간’이라는 워싱턴포스트 공동기고문을 통해 ‘친서’ 전달 사실을 공개한 바 있다.

―친서를 어떻게 처리했나.

“당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 중이었는데 11월 3일 친서를 전달받았다.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의 평양 방문(10월)으로 2차 북한 핵 위기가 터지고 2∼3주 뒤였다. 워싱턴으로 돌아와 스티븐 해들리 당시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한국어 표현을 지인(知人)을 통해 영어로 번역한 것도 같이 줬다. 김 위원장의 친서를 내게 전달한 사람은 강 제1부상이다. 그는 ‘친서는 김 위원장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중요한 문건에 서명이 없다는 게 이상하다.

“외교적으로 구두 메시지(verbal message)로 통하는 방식이다. 공식문서 형식을 피한 것은 사후에 부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부시 행정부는 어떻게 반응했나.

“해들리 부보좌관은 ‘미국은 나쁜 행동에 보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뒤 부시 행정부는 제네바합의 파기를 이유로 대북 중유 공급을 중단했다.”

―왜 31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공개하나.

“북한은 비밀유지를 요청했고, 미국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김정일-정동영 회동이라는 호재를 살리기 위해 공개를 결심했다.”

―친서에 ‘이번에 발생한 핵문제는…’이라는 대목이 있다. 2차 북핵 위기의 원인이 된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 같은데….

“강 부상은 당시 HEU의 존재를 시인하지 않았지만 부인하지도 않았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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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오버도퍼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왼쪽)와 그가 백악관에 전달한 ‘김정일 친서’ 원문.

▼부시, 친서 무시이유…北 불가침요구 수용땐 외교원칙 훼손▼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미국이 북한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불가침을 확약하면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002년 ‘구두 친서’를 왜 무시했을까.

백악관에 친서를 전달한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23일 “스티븐 해들리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이 ‘(북한의)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며 친서 내용을 무시했다”고 말했다.

‘나쁜 행동’이란 북한의 제네바합의(1994년) 파기를 말한다. 북한은 경수로 건설 및 연간 중유 50만 t 제공이라는 ‘과실’을 얻고도 비밀리에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에 나섰다는 게 미국의 주장이다. 친서가 전달된 시점은 북한의 HEU프로그램 문제로 제2차 북핵 위기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워싱턴의 외교 및 한반도 전문가들은 “전 세계를 상대로 외교를 해야 하는 미국으로선 이런 원칙 훼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친서에 들어 있는 김 위원장의 요구는 “미국이 먼저 북한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불가침을 약속하라”는 말로 요약된다. 부시 행정부의 ‘선(先) 북핵 포기, 후(後) 보상논의’ 구상과 180도 다른 이야기다.

게다가 친서가 전달됐다는 2002년 11월은 부시 행정부가 북핵 처리에 다소간의 시간 여유가 있다고 판단하던 때여서 친서를 무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한미일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에서 “북한이 HEU를 무기화하기까지는 1∼2년의 시간이 있다”는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무엇보다 이라크전쟁(2003년 3월)의 결심을 굳히고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던 때여서 ‘김정일의 얘기’가 귀에 들어올 틈이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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