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큰소리만 치는 외교로는…

  • 입력 2005년 4월 1일 19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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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지난해 2월 한 비공식 자리에서 “나는 외교에 적합한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구를 만나면 옷차림새를 칭찬하는 등 성의를 다해 ‘풀 서비스’를 하고,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논쟁이 벌어지면 빨리 뒤로 빠지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하지만 그런 노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 외교의 현실은 ‘외교 대란(大亂)’이라는 말이 나돌 만큼 험난하다. 일본과는 독도 문제 등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고, 미국과는 주한미군의 역할과 북한 핵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껄끄럽다. 중국과의 관계도 고구려사 왜곡, 탈북자 처리 문제로 갈등 요인을 안고 있다.

국내에선 노 대통령이 대일관계를 비롯한 주요 외교 현안에 관해 정책 방향을 잡고, 직접 전면에 나서 민감한 발언을 하는 과정에서 주무 부서인 외교통상부가 소외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렇게 된 데는 상대국이 원인을 제공한 점도 있지만 “할 말은 하겠다”는 노 대통령 특유의 직설적인 외교 스타일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비주류 정치인으로서 기존의 권위와 기성 질서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화를 추구해 온 노 대통령의 정치 역정과 행태가 고스란히 한국 외교에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부와 정치권 일각에선 노 대통령이 국내 정치를 하듯 외교를 하는 것 같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의 대외관계가 순탄하다면 대통령의 외교 스타일이 문제될 리 만무하다. 지금 ‘노무현 외교’가 논란을 빚는 것은 국제 역학구도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을 냉정히 분석하고, 실리를 도모하는 대신 민족주의적인 이상과 명분에 집착하는 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독도 문제에 관해 미국이 은근히 일본을 편들듯 하는 것을 한국인들은 못마땅해 하지만 미국의 시각에서 한국과 일본 중 어디가 더 중요한 우방인지는 분명하다. 같은 미국의 동맹이지만 한일의 격은 다른 게 현실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의 각별한 친분을 토대로 미일 밀월을 이끈 당사자다. 그가 최근 서울에 왔을 때 “외교를 수행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점은 자국이 국제관계 등에서 위기를 맞았을 때 믿음직한 친구가 되어 줄, 신뢰할 수 있는 벗을 1, 2명 정도는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이 깊이 새겨야 할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벗이 있는지, 위급할 때 도와줄 국가가 과연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외환위기 때 미국과 일본에 제발 도와달라고 황급히 손을 내민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앞으론 그런 일이 절대로 없을 만큼 우리의 국력이 정말 커졌는가. 큰소리치는 한국 외교를 보면서도 선뜻 확신이 서지 않는다.

외교의 본령은 외국과 원만하게 지내는 것이다. 갈등을 얼굴을 붉히지 않고, 큰소리치지 않고 푸는 게 외교적 수완이다. 투사(鬪士)의 얼굴을 한 외교는 보기엔 후련해도 ‘외교적 수사(修辭)’와 ‘외교 관행’을 적절히 활용하는 유연한 외교보다 실속이 없을 수도 있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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