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방형남 칼럼]‘23일간의 세계 일주’

  • 입력 2004년 11월 17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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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어느덧 해외순방 외교에 이력이 난 것 같다. 외국에 나가 생면부지의 외국 정상을 만나 국익을 챙기는 노하우를 이미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의 외교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정부 고위인사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외부에서 보기에도 대통령의 외교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느낄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작년 5월 9일 미국 방문을 이틀 앞두고 청와대에서 신문 방송 인터넷매체 외교안보담당 논설위원 및 해설위원 20여명과 오찬모임을 가졌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는 토론도 아니고 질문 답변하는 자리도 아니다. 얘기 듣고 (미국 방문에서) 실수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마련했다”고 모임의 성격을 규정했다.

▼밖에서 행복한 대통령▼

그래서인지 참석자들은 갖가지 주문을 쏟아냈다. ‘불경스럽게도’ 여러 참석자들이 생전 처음 미국에 가는 대통령에 대한 불안과 초조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듣기에 아슬아슬한 발언도 있었다. 노 대통령은 “듣는 자리지만 반론과 해명하겠다”며 길게 설명을 하기도 했고, “명색이 대통령이다”라는 말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도 모임은 “조언이 도움이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대통령의 긍정적 평가로 끝났다.

그 뒤 노 대통령은 일본과 중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외국순방을 앞두고 언론인을 만나 조언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경험이 쌓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정상외교의 재미까지 알게 된 것 같다. 이달 초 MBC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방문하는 나라마다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며 성과를 자랑스러워했다.

정상외교 순항은 좋은 소식이다.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릴 국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외교만으로는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외교가 잘된다고 해서 수렁에 빠진 내치(內治)를 건질 수는 없다.

국력이 대통령의 힘을 만드는 원천이지만 대통령 스스로 할 일도 있다. 노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에 만날 주요국 지도자들의 면면을 보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여전히 재선에 성공한 기쁨에 취해 있을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도 재선에 성공한 인물이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노 대통령과 비슷한 시기에 지도자 자리에 올랐지만 현재의 국내기반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장쩌민을 물러나게 하고 군사위원회 주석까지 거머쥐었다. 하나같이 국력에 개인적 지도력을 크게 보탠 인물들이다. 그런 지도자들에 비하면 지지율 20%대에 머물고 있는 노 대통령의 국내기반은 초라하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한 전직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습관처럼 똑같은 넋두리를 반복했다. “정말이지 서울에 돌아가기 싫어. ‘외교 대통령’이나 했으면 좋겠어.”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식들의 비리 등으로 국내에서는 풀이 죽어 있다가도 외국에 나가면 금방 활기를 찾았다. 다시 정상외교로 국내의 시름을 달래기에는 국내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외교로 국내 시름 달랠 수 없다▼

노 대통령은 남미 순방을 마치고 잠시 귀국했다가 28일부터 다음달 8일까지 라오스에서 열리는 ‘아세안+3’ 정상회의 참석에 이어 영국 프랑스 폴란드를 방문한다. 청와대는 ‘숨가쁜 정상외교’라고 표현했지만 ‘23일간의 세계 일주’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정상외교는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처럼 세계를 한 바퀴 도는 게 목적이 아니다. 순방의 성과가 국내에 투영되어야 한다.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대통령이 밖에서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행복해야 한다. 노 대통령 스스로 국내에서도 대접받는 길을 찾기 바란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아닌가.

방형남 논설위원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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