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방형남 칼럼]여론은 죽었는가

  • 입력 2004년 8월 11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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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20%대에서 맴돌고 있다. 현대리서치연구소가 이달 2∼5일 전국의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노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하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22.9%에 불과했다. 한 달 전 26.0%에서 3.1%포인트 떨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사회연구소가 전국 성인 7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겨우 22.8%가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 정도면 대통령이 잘못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따질 필요도 없다. 국민 5분의 1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 ‘외로운 지도자’가 현재의 노 대통령이다.

▼‘외로운 지도자’의 선택▼

시험에서 20점을 받은 학생의 선택은 대체로 두 가지 가운데 하나다. 공부를 잘해 보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은 학생은 크게 반성하고 다음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학업에 매달릴 것이다.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부모와 스승 앞에서는 미안해서 고개를 숙인다. 또 다른 선택은 공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면 그 길밖에 없다.

노 대통령도 선택을 한 것 같다. 우선 지지율 20∼30%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책임을 남에게 돌리려는 기미가 보인다.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라는 사람은 경기 침체를 언론의 비관적 보도 탓으로 돌렸다. 대통령 자신은 일부 언론에 ‘완장문화’ ‘군림문화’라는 타이틀까지 만들어 붙였으니 모르긴 몰라도 책임 전가는 시리즈로 계속될 것 같다.

대통령 지지율은 국민과 특정 언론의 국정 기여 성적이 아니라 대통령 자신의 국정 운영 결과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손가락질을 할 처지가 아니다. 자신은 할 일을 다하지 않으면서 교사나 집안 형편 등 이것저것 핑계를 대는 학생이 떠오른다.

두 번째는 여론 무시 경향이다. 추락하는 지지율에 놀라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취임 1년 6개월 만에 벌써 낮은 지지율에 적응했나. 이래서는 남은 3년 6개월에 기대를 걸기 어렵다. 우리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내각제에서는 지지율이 떨어지면 정부가 바뀐다는 사실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여론 무시는 바야흐로 어깃장 놓기로 변했다. 어제 행정수도를 충남 연기-공주로 옮기기로 확정한 정부 결정의 핵심은 여론 묵살이다.

이해할 수 없다. 이 정부에 여론조사가 어떤 것이었는지 벌써 잊었단 말인가. 지난 대선에서 노 후보를 반(反) 이회창 단일후보로 만든 것이 여론조사였고, 탄핵사태 때 국회를 쿠데타 세력으로 매도한 근거가 여론조사였다. 유리할 땐 삼키고, 불리하면 뱉는 것이 이 정부의 처세술인가.

여론조사 결과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자랑할 만한 업적을 내세워 보라. 경제 민생 국력결집 등 내치(內治)와 대미 대중 대일관계 등 외치(外治)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가.

▼무능 무감각 무책임이 무섭다▼

오늘날 이 땅의 여론과 언론은 철저히 무시당할 만큼 하찮은 수준이 아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귀양지 엘바섬에서 탈출해 파리에 입성할 때까지 20일간 나폴레옹을 ‘악마→늑대→나폴레옹→황제폐하’로 바꾸어 부르면서 기회주의로 일관한 프랑스 신문처럼 줏대 없는 언론이 아니다. 독재정권의 서슬에 놀라 잔뜩 움츠린 채 할 말을 하지 못하던 시절의 국민도 아니다. 여러 정보에 접근하고 이모저모 따져 가며 사리 판단을 하는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여론을 죽이는 반(反)민주적 행태다. 반론의 참여를 거부하니 반(反)참여정부 아니면 최소한 반(半)참여정부다.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반성하고 열심히 공부하려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혹시 노 대통령이 ‘내가 떠난 뒤에 노아의 홍수가 발생해 지구가 멸망하건 말건 나는 알 바 아니다(Apr`es moi, le d´eluge)’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무능도 문제지만 대통령의 무감각 무책임이 더욱 두렵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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