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圈 시스템 따로따로]<下>중구난방 의원들

  • 입력 2004년 8월 3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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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발언을 안 합니까?” 17대 국회 개원 직후 소집된 열린우리당 의원총회. 중진 K의원이 초선 K의원에게 다가가 넌지시 물었다. 당시 의총장에는 몇몇 ‘열혈 초선’들만 돌아가며 마이크를 들고 소신을 피력하고 있었다. 초선 K의원이 “아직 제대로 의정활동도 못하고 있는데 할 말이 있겠느냐”고 얼굴을 붉히자 중진 K의원은 몇몇 초선 의원을 가리키며 “먼저 배우는 자세로 임하려 하지 않고 튀려고부터 하니…”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론보다 자기 정체성이 우선=일부 의원은 당이나 정권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데 더 주력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라크 파병 문제 등 각종 현안을 놓고 당 지도부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고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인적 소신을 고수하겠다는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는 셈이다.

노 대통령이 6월 16일 파병 반대 의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했을 때도 일부는 “대통령을 만난 뒤 계속 반대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다”며 불참했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신 풍속도다.

언론개혁 문제만 해도 당 일각의 ‘속도조절론’은 몇몇 초선 의원의 강한 드라이브에 묻히고 있는 실정이다.

개별 의원이 당내 토론과 합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법안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이것이 당론인 것처럼 보도돼 혼선이 빚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 때문에 당정책위원회는 최근 개별적인 의원입법 발의도 반드시 정책위를 거치도록 ‘사전신고제’를 도입하는 궁여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신기남(辛基南) 의장이 최근 공사석에서 여러 차례 “우리 당 의원들은 개인기는 훌륭한데 서로 호흡이 잘 맞지 않아 패스 미스가 잦고 결정적인 찬스에서도 슈팅하면 골을 넣기는커녕 골포스트를 맞히곤 한다”고 지적한 것도 이 같은 고충을 토로한 것이다.

▽혼선의 근본 원인은?=집권 여당의 자중지란은 당(黨)-청(靑) 분리, 혹은 수평적 리더십 등 새로운 정치실험에서 파생된 측면이 적지 않지만 다른 근원적인 요인도 작용하고 있다.

말로는 청와대와 당이 서로 “우리는 한 배”라고 하지만 실제 총선 결과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소속 의원들의 생각이 제각각이다. 일부 의원은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의 반사이익을 봤다”고 하지만 또 다른 의원들은 자신들의 개혁성과 전문성으로 당선됐다고 자부한다.

한 재선 의원은 “권력의 핵심과 나쁜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지만 이 정권에서 장관이라도 해 보려는 의원들 말고는 대통령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 다음 총선은 노 대통령이 퇴임한 후이고 노 대통령이 공천권을 행사하는 것도 아닌데…”라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관료 출신, 개혁당 출신, 재야 출신, 노 대통령 직계 출신 등으로 분화되면서 이들 계파간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나 당과 원내대표실로 시스템이 이원화된 것도 당의 장악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출신이 다양한 세력들이 한데 모여 거대 정당을 이룬 탓에 의원들뿐만 아니라 당직자들이나 당원들의 목소리도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있다. 최근 기간당원 자격 문제 등을 둘러싼 내홍이 그 단적인 예다.

▽책임 여당의 면모를 갖추려면=의원들이 각자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진전된 모습으로 일단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백가쟁명식의 주장을 하나의 당론으로 종합하고 정책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천정배(千正培) 원내대표는 사안이 있을 때마다 원내부대표들을 동원해 소속 의원들을 ‘5호담당제’로 분담시켜 총의를 모으는 데 노력하고 있지만 워낙 개성이 강한 의원이 많아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 중진 의원들로 구성된 기획자문위원회도 몇 명이 돌아가며 ‘논평’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중진은 “청와대가 자주 의원들을 그룹별로 만나 다독이고 국정 운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고 국정 방향도 설명해 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런 점에서 청와대 정무라인이 없어진 것을 한탄하는 중진이 많다.

근본적으로는 “총론(이념)에만 강하고 각론(정책)에는 약하다”는 지적을 초선 의원들이 겸허하게 수용하고 ‘튀는 행보’보다는 ‘공부하는 자세’로 하반기 민생 국회를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이훈기자 dreamland@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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