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주성원/문화장관의 뒤늦은 '현장론'

  • 입력 2003년 9월 21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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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산하 문화예술기관장 편파 인사에 항의하는 ‘연극인 100인 성명’이 나온 다음 날인 20일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이 성명을 주도한 연극인들과 오찬을 함께하며 대화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날 오찬 간담회는 이 장관이 제안해 마련된 자리였다. 연극계에서는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 정진수 성균관대 교수, 기국서 극단 ‘76단’ 대표, 김영수 극단 ‘신화’ 대표, 이종훈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 등 10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연극인은 “장관은 최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출신 인사들이 집중적으로 기관장에 임용된 데 대해 해명했으며, 현 문화예술진흥원을 문화예술위원회로 체제를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는 ‘현장 예술인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결정할 것’을 약속했다”고 전했다. 그는 “성명이 나온 지 하루 만에 직접 나서 해명하고, 앞으로 현장의 소리를 많이 듣겠다고 약속한 이 장관의 태도는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그러나 장관의 설명에는 수긍하기 힘든 대목이 많았다”고 말했다. 단적인 사례가 이 장관이 이날 “지금까지 인사에서 ‘코드’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능력 위주의 인사를 하다 보니 민예총 출신이 많이 배치됐을 뿐”이라고 해명한 것. 한 연극인은 이에 대해 “문화예술계에서 민예총 소속 예술인들이 수적으로 극소수를 차지함에도 인재들이 그쪽에만 몰려 있다는 주장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번 연극인들의 성명은 절대로 가볍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성명에 참여한 연극인들이 연극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인사들이라는 점, 인맥이나 성향 면에서도 특정한 부류로 묶을 수 없는 인사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개성이 강해 단결하기 쉽지 않은 예술인들이 정부의 조치에 대해 집단적으로 항의했다는 것 자체가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현장 예술인’ 출신인 이 장관은 연극인들과 평소 친분이 돈독하다. 이날 모임에서도 이 장관은 “연극 쪽은 친정 같은 느낌이 들어 가보지 않아도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보지 않고도 다 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문화행정을 총괄하는 장관이라면 정책 결정에 앞서 현재 예술인들이 치열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장을 면밀히 파악해야 한다. 예술인들이 참다못해 ‘큰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비로소 현장을 되돌아보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현장 출신’ 장관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늦게나마 ‘현장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말한 이 장관의 약속이 지켜질지 연극인들은 주시하고 있다.

주성원 문화부 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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