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승련/홍보처의 ‘속보이는’ 여론조사

  • 입력 2003년 8월 17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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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홍보처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발표한 직후인 15일 오후 국무총리 기자실에서 8·15 경축사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국정홍보처가 밑줄을 쳐 가며 강조한 조사 결과는 크게 세가지로 압축된다. ‘노 대통령의 경축사는 적절했고, 자주국방 토대 마련 및 동북아 주역으로의 도약과 같은 구상이 큰 지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응답자의 84%는 “경축사 내용이 적절했다”고 답했다. 또 “10년 내 자주국방 역량을 구축하겠다”는 데에는 93%가 찬성했고, “국민통합과 혁신을 통한 동북아 주역 도약 구상에 공감한다”는 응답도 89%에 이르렀다.

그러나 설문 내용을 살펴본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 전문가는 “질문 내용이 너무 뻔한 것이어서, 정보로서의 활용가치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번 조사의 설문 내용대로 “동북아 주역으로 도약하기 위해 국민통합으로 나가고, 통합된 힘으로 각 분야의 혁신을 이뤄야 한다고 대통령이 밝혔다. 공감하느냐” “대통령이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10년 이내에 자주국방의 역량을 갖출 토대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찬성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하자. 이런 질문에 대한민국 국민 중 몇 명이나 “글쎄, 그건 아닌데요”라고 답변할 수 있을까. 한 여론조사기업 대표는 심지어 “내게 조사 의뢰가 왔다면 조사용에 맞춰 질문 문항을 고치자고 제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주요 현안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려는 태도에 시비를 걸 수는 없다.

문제는 보도자료가 배포된 당일 밤 TV 뉴스나 16일 조간신문에서 이 여론조사 결과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그 답은 이번 조사가 정부의 ‘희망사항’과 질문을 뒤섞어 진행됐다는 데서 찾아야 할 듯하다.

질문을 받은 조사 대상자들은 ‘이러이러한 비전을 정책으로 펴나가겠다’는 ‘이러이러한 비전을 정책으로 펴나가겠다’는 정부 의지의 천명으로 받아들였을 뿐, 반대 의견 제시가 가능한 설문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란 얘기다. 게다가 국정홍보처는 경축사를 하기 하루 전인 14일 전국의 휴대전화 소지자에게 자동응답기를 통해 전화를 걸어 “내일 오전 10시에 시작될 경축사를 듣겠다”는 시민 3000명을 찾아낸 뒤 15일 오전 “경축사를 들었다”는 1000명을 상대로 자동 여론조사를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이미 조사의 방향성이 정해져 있었음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러고도 국정홍보처의 여론조사비용(이번에 500만원)이 ‘국고 낭비’란 비판을 면할 수 있을까.

이번 조사가 일반 국민의 여론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냐 하는 논란의 여지도 있다. 조사는 14일 휴대전화 소지자에게 자동응답기를 통해 전화를 건 뒤 “경축사를 듣겠다”고 약속한 시민 3000명 가운데 “오전 10시에 경축사를 들었다”는 1000명을 상대로 15일 진행됐다. 경축사를 듣겠다고 약속하고 실제로 공휴일 아침에 챙겨 들은 응답자들은 대통령의 국정활동에 ‘평균 이상’의 관심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볼 때 국정홍보처의 조사비용(500만원)이 ‘국고 낭비’란 비판을 면할 수 있을까.

김승련 정치부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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