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임규진/정부의 '말 빚'

  • 입력 2003년 5월 26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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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은행 노동조합은 최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재면담 및 TV공개토론’을 제안했다. 이 은행 노조에 따르면 노 대통령이 ‘정부와 노조가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 실사를 맡겨 조흥은행의 독자생존 여부를 판단하자’고 당선자 시절인 1월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조는 “대통령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재정경제부와 예금보험공사는 무조건 매각을 목적으로 외압(外壓)을 행사해 실사결과를 조작하려고 했다”며 29일 하루 전국 영업점에서 시한부 총파업에 돌입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1월의 약속으로 당시 조흥은행의 총파업은 피했지만 지금은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그 비용은 이 은행의 매각을 둘러싼 갈등 증폭과 대통령 권위의 실추 등이다.

개별 사업장에서 효과를 보는 듯했던 노 대통령의 갈등해법이자 한쪽의 양보를 요구하는 ‘대화와 타협’이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다른 갈등 현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두산중공업 노사분규, 화물연대 파업 사례를 보자. 이때 정부와 사용자측의 양보로 급한 불은 일단 껐다.

하지만 정부가 화물연대에 약속한 유류세 추가보전에 자극 받은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전국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는 얼마 전 정부에 동등한 지원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들 노조는 ‘수용되지 않으면 파업도 불사하겠다’고 압박했다.

노 대통령이 각각의 사안에 적용한 ‘대화와 타협’이 국가경제 전체적으로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각 개인 또는 일부분에 좋은 것이 전체에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게 바로 구성의 오류다.

이는 특히 경제 부문에서 많이 나타난다. 개별 노조의 임금인상은 해당 사업장 근로자에게 유익한 것이지만 모든 노조의 임금인상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전체 근로자 임금이 모두 올라가면 기업의 수익률이 떨어지면서 투자도 줄고 일자리도 줄어들 수 있다.

결국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이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법과 질서 안에서 공정한 게임을 벌이도록 하는 것이다.

편향된 논리의 대화와 타협이 법과 질서를 벗어나면 힘의 논리가 판치고, 이는 ‘만인 대(對) 만인의 투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국가 이전의 무정부 상태로 가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구성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판단의 기준을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익에 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임규진 경제부 기자 mhj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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