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승련/‘주는 南 받는 北’ 언제까지

  • 입력 2003년 5월 25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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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밤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된 5차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담의 최종 합의내용은 한마디로 “급한 것은 결국 한국 정부”라는 사실만 재확인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7개항 합의결과는 쉽게 말해 남측이 북한에 7000억원어치의 쌀(40만t)도 공짜로 주고, 개성공단에 투자도 하고, 금강산 관광 대금도 지불한다는 얘기로 요약할 수 있다.

상거래 표현을 빌려 우리를 채권자격인 갑(甲)으로, 북한을 채무자격인 을(乙)로 상정할 경우 우리는 갑이면서도 일방적으로 주기만 했을 뿐 이른바 채권자 대접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격이다.

정부는 이번 경추위 회담에 앞서 한미정상회담 이후 달라진 국내외 분위기를 감안해 “북한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진 않겠다”는 방침을 확고히 세웠다. 최소한 ‘주면서도 끌려 다니는’ 잘못된 관행만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정부의 이런 의지는 남북 양측의 첫 만남에서부터 나타났다. 평양 양각도 국제호텔에서 열린 첫 회의에서 북측 대표가 “남한에 재난” 운운하는 기조연설을 하자 대표단이 사과를 요구하며 강경하게 맞서면서 회담결렬도 불사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김희상(金熙相) 대통령국방보좌관도 “급할 게 없다. 북한 태도에 변화가 없으면 (대표단이) 그냥 내려올 수도 있다”고 은근히 위협을 가하며 한국 협상단을 후방 지원했다.

그러나 정작 최종 회담합의문 내용에는 별렀던 북핵 문제가 한 줄도 담기지 못했다. 더욱이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대목은 북측의 협박성 발언에 대해 “남북한이 잘 되기를 기대하는 뜻이었다”는 두루뭉술한 구두 해명으로 양해를 해준 점이다.

여기에다 우리 대표단은 회담 종료 후 처음 배포한 설명자료에서는 “북한측 해명은 사안의 심각성에 비춰 만족스럽지 않다”고 지적했다가 1시간 만에 이 대목을 삭제한 대체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겉으로는 ‘제 목소리를 내겠다’고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북한 달래기’에 급급했다는 느낌을 안겨주는 게 사실이다.

물론 ‘뒤바뀐 갑과 을’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걸핏하면 막무가내로 나가는 북한과 여차하면 주먹을 쓸 태세인 미국 사이에서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내야 하는 우리 정부의 어려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갑의 입장’을 세우겠다는 당초 방침을 살리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남북간의 회담문화에 변화가 올 것을 기대했던 국민에게 ‘무엇이 급하기에 아직도 끌려 다니기만 하느냐’는 의구심을 다시 한번 안겨준 것만은 분명하다.

김승련 정치부 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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