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욱칼럼]盧의 '부적절한' 밀어붙이기

  • 입력 2003년 4월 30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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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이미지의 소유자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후 실용주의자로 변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나라를 위해서도 그렇고, 그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는 국정의 안정을 위해 보수적인 고건 총리를 기용하고 종래의 비판적인 대미 노선에서 한미동맹을 최우선시하는 쪽으로 급선회했으며, 국가정보원장을 제외한 외교안보팀도 비교적 보수적인 인사들로 충원했다. 전교조의 반미교육에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해 전교조측으로부터 “미국의 환심을 사려고 전교조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견제 거부한 국정원장 임명강행 ▼

무엇보다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개인적 관계를 뛰어넘어 대북 비밀송금 의혹사건 특검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국민 여론과 원만한 대야관계를 염두에 둔 현실적응이라 할 것이다.

그런 노 대통령이 취임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국정원 원장과 기조실장 임명을 둘러싸고 야당과 정면 대결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부적절’ 의견에도 불구하고 인권변호사인 고영구씨를 국정원장에 앉힌 데 이어 대야관계에서 최후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서동만 상지대 교수의 기조실장 임명까지 강행한 것이다. 국회 정보위는 여야 동수인 6 대 6으로 구성되고 여당측이 위원장을 맡고 있다. 노 대통령은 정보위에서 여야가 나름대로 진지한 논의 끝에 내린 ‘부적절’ 의견을 ‘월권’이며 ‘색칠하기’라고 비난하면서 심지어 일부 정보위 소속 의원에 대해서는 국정원이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할 때 행세하던 사람이라고 인신공격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정보위의 여당 의원들까지 ‘보수반동’으로 몰리는 희한한 사태가 되고 말았다.

이 같은 노 대통령의 임명 강행은 단순히 국회를 경시한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정치실험에 제동을 건 처사다. 국정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등 4대 권력기관장에 대한 인사청문회 실시는 ‘정치개혁’의 하나로 여야 합의 아래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도입한 것이다. 즉 ‘제왕적 대통령’을 방지하기 위해 종래 통치자에게 ‘전가(傳家)의 보도(寶刀)’ 노릇을 해온 권력기관장의 임명을 대통령이 마음대로 못하도록 국회의 견제장치를 신설한 것이다.

올 1월 관계법이 마련된 이래 이번에 최초로 인사청문회가 실시되었다. 청문 결과 제시된 국회의 의견은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이 제도의 도입 취지에 비추어 대통령은 마땅히 이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기 훨씬 이전인 당의 상임고문 시절이던 2001년 11월 당론과는 달리 특검제 상설과 검찰총장 및 국정원장에 대한 국회의 인사청문회 실시를 주장하는 ‘돌출적 발언’을 해 당내에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결국 제왕적 대통령을 막기 위한 정치개혁 조치의 하나로 마련한 이 제도가 초장부터 삐걱거리게 되었다.

이번 노 대통령의 국정원장 인선은 국정원 개혁 쪽에 중점이 두어졌다. 과거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저질러 온 엄청난 과오를 감안하면 국정원을 완전히 환골탈태시키겠다는 그의 의욕은 높이 사서 마땅하다. 그렇기는 하나 국정원의 업무는 국가안보에 있다. 국가안보는 정책의 최우선 과제라는 사실을 그가 투철하게 인식했다면 정보 업무에 경험이 없고 이념 문제가 제기된 인사들을 국정원장이나 기조실장에 임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국정의 우선순위를 망각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국정원의 정치 간여와 인권유린은 막아야 하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가안보에 관련된 정확한 정보 수집과 간첩 적발, 그리고 국가 전복 방지 능력을 높이는 일이다.

▼정보委 전문가들 의견 경청해야 ▼

국내의 안보태세가 지금처럼 해이해진 것은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국민에게 심어 준 한반도 평화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과제는 안보태세를 시급히 재정비하는 일이다. 김 정권 때 국정원장에 대한 불신이 정부의 대북정책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된 것을 알면서도 이념적 편향성이 지적된 인사들을 핵심 요직에 포진시킨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노 대통령은 지금부터라도 야당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국회의 정보통들이 모였다는 정보위의 목소리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

남시욱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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