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제성호/북한인권 쉬쉬할 때인가

  • 입력 2003년 4월 13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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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은 10일 제네바에서 개최 중인 제59차 유엔인권위원회에 북한의 인권 상황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북한 인권 결의안 상정은 1946년 유엔인권위 창립 이래 처음 있는 일로서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번 대북 결의안 상정 배경에는 그간 국제사회가 정치범수용소, 공개 처형, 불법 구금 및 실종, 송환된 탈북자 처벌 등 북한 인권 실상의 개선을 촉구했음에도 북한 당국이 이를 거부하고 있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유엔아동기금과 세계식량계획이 공동 작성한 ‘북한의 영양평가보고서 2002’와 ‘2002년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 등에서 지적했듯이 북한 주민의 인권이 날로 악화되고 있음에도 김정일 정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풀이된다.

▼‘조용한 외교’ 노선 수정돼야 ▼

최근 유엔 안보리에서의 북한 핵문제 논의에 이어 북한 인권문제의 유엔인권위 상정(16일 통과 예정)은 앞으로 국제사회가 안보 문제와 인권 문제를 똑같이 중요한 비중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북한의 인권 개선(정치 민주화) 없이는 당면한 핵문제 해결도 어렵다고 판단했음을 의미한다. 사실 나치즘과 군국주의를 통해 인류가 깨달은 진리는 ‘국내적 자유’와 ‘국제적 평화’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EU와 유엔의 태도는 ‘인권에는 국경이 없다’는 보편주의적 접근, (국가)주권보다 인권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국제 여론, 인권단체들의 국제적 연대 현상을 의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엔이 북한 인권문제를 다루기로 한 이상 향후 국제사회는 특별보고관 선임, ‘인권사찰’ 실시 등을 통해 북한 주민의 인권 보호와 대북 인도적 개입을 위한 노력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은 이러한 국제사회의 움직임과는 거리가 있다. 4월 1일 국가별 인권상황의제 제9항을 다룬 유엔인권위 회의에서 주제네바 유엔대표부 한국대사가 행한 발언에는 탈북자 등 북한 인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정부는 EU의 북한 인권문제 상정에도 유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여전히 북한의 눈치를 보는 ‘조용한 외교’ 노선을 견지했던 것이다.

참여정부의 ‘평화 번영 정책’ 해설 자료에도 북한 인권 문제에 관한 설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통일 철학의 빈곤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평화 번영 정책’의 수혜자는 탈북자 등 북한주민을 포함한 전 민족 성원이어야 한다. 북한 ‘주민’의 번영은 인권 및 삶의 질 개선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지난 수년간 ‘퍼주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북 지원과 협력을 제공했지만 북한 주민의 인권은 근본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부가 북한의 인권 상황을 외면하는 대북정책을 앞으로도 계속 추진한다면 결단코 도덕성과 정당성은 물론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서독은 1961년 베를린장벽이 건설된 직후 연방 법무부 산하에 ‘동독 내 정치적 폭행 기록보존소’를 설치해 동독 관리의 인권 침해 사실을 6하원칙에 따라 상세하게 기록했고, 이를 통일 후 과거 청산에 활용했다.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양독간 교류 단절을 위협함으로써 대(對)동독 인권정책 변경을 요구했으나 서독은 끝내 굴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서독은 동독 정권의 인권 침해를 줄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인권 빠진 대북정책 설득력 없어 ▼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3.5%가 정부의 대북 지원을 북한의 인권 개선과 연계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 같은 여론을 대북정책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 탈북자 문제의 경우 당당하게 따지고 국제 인권기구의 접근과 참여를 모색하는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북한의 인권 개선 없이는 진정한 남북 평화공존, 나아가 민족공동체 형성과 평화적 통일을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평화 번영 정책’에서 대북 인권 정책을 올바로 자리매김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하겠다.

제성호 중앙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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