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5억 北송금 파문]청와대 앞뒤 안맞는 '통치행위論'

  • 입력 2003년 2월 4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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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5억원 대북 비밀송금은 현대의 대북사업 독점 계약 대가’라는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의 발언이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박 실장은 4일 청와대 직원 월례조회에서 “현대는 개성공단 등 7개 사업을 북측으로부터 30년간 보장받는 계약을 했다. 언젠가 북한핵 문제가 해결되고 국제사회가 북한 경제개발에 참여할 때 현대의 독점계약이 우리 기업의 대북 진출에 큰 기반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박 실장의 이 같은 주장은 현대상선측이 대북 비밀송금 사실을 시인하면서 밝힌 논리와 똑같다. 대북 송금이 민간기업의 비즈니스 활동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는 최근 대북 송금 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측이 보여온 견해와 모순된다. 우선 대북 송금이 민간기업 차원의 비즈니스 활동이었다면 구태여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직접 나서 ‘통치행위’였다는 해명을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게 정치권의 지적이다.

더구나 민간기업의 행위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사법심사 불가’를 공언한 일은 사리에 맞지 않은 데다 순수한 기업활동이었다면 진상규명을 위한 검찰 수사가 남북 화해협력에 지장을 초래할 이유도 없다는 게 정치권의 비판 논거다.

박 실장은 또 대북 비밀송금이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폈다. 하지만 ‘국익’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국민을 대상으로 설득하려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전후 사정을 성실하게 밝히고 국민 앞에 ‘고백성사’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민주당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또한 개인 기업이 ‘국익’을 위해 투자했다면 그 과정을 전후해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편의나 특혜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순리다.

실제 여권 내에서도 이미 현대의 대북 송금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이 편의를 제공했을 가능성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에다 현대가 산업은행에서 4000억원을 대출받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역할, 2235억원과 남북정상회담 성사의 관련성 여부 등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그런데도 청와대측은 필요할 경우에만 일방적으로 해명을 하고 의혹 사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측이 대북 비밀송금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깊숙이 개입이 돼 있고 이를 밝히기 어려워 침묵하고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여원일각 "장세동같은 측근하나 없다니…▼

“이 정권에는 장세동(張世東) 같은 사람이 없나.”

2235억원 대북 비밀송금 의혹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리자 민주당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일각에서 DJ의 핵심 측근과 가신(家臣)들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당료 출신의 한 인수위원은 “대통령이 직접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사법심사는 적절하지 않다’고 해명까지 하고 나섰는데도 누구 하나 ‘내 책임이다’며 총대를 메는 사람이 없다”며 대통령 측근들의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집중 비난했다.

이 위원은 “대통령이 잘 나갈 때는 서로 ‘충성 경쟁’을 하면서 대통령 주변에 모여들더니 지금 대통령이 코너에 몰리니까 어느 누구도 ‘내 탓이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탄식했다.

그는 이어 “대통령이 직접 해명하고 나선 만큼 진정한 가신이라면 ‘내가 이 문제를 주도했고 대통령에게는 최근에서야 보고했다’며 덮어쓰는 의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청을 높였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도 “정작 책임을 져야 하는 장관도 측근도 모두 발뺌만 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외환銀, 2235억입금 이서확인 안해▼

현대상선의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이 현대상선이 대북관련 사업자금으로 사용했다고 밝힌 산업은행 수표 26장(2235억원)의 이서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수표를 받아들인 것으로 감사원의 감사 결과 드러났다. 이 때문에 이서를 확인하는 과정에 외부 압력이 있었는지 의혹이 일고 있다.

감사원 관계자는 4일 “수표추적을 하면 수표유통의 첫 고리와 마지막 고리를 알 수 있다”며 “현대상선이 당좌대월 계약에 따라 발행한 산업은행 수표 26장은 주로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을 거쳤다”고 밝혔다.

산업은행의 4000억원 당좌대월은 현금을 빌려주는 대출방식이 아니라 수표를 발행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현대상선이 산업은행 수표를 발행하더라도 이를 현금화하거나 계좌에 입금해 다른 계좌로 보내려면 시중은행에 수표를 제시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원 관계자는 당시 외환은행 등에 제시된 수표 26장의 뒷면에는 조회가 불가능한 가공인물 6명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적혀 있었으나 아무런 문제없이 처리됐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평소에 거래가 잦은 주거래은행이라면 이서 내용을 철저하게 확인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은행들이라면 엉터리 이서가 된 수표를 쉽게 받아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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