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건씨 택했나]집권초 국정 안정운영 우선 고려

  • 입력 2003년 1월 21일 01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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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가 새 정부 내각을 통할할 첫 국무총리로 ‘고건(高建) 카드’를 선택한 것은 2004년 4월에 있을 17대 총선 때까지의 국정 1기를 안정감 있게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다.

노 당선자는 대선 직후 일찌감치 “선거 때 나를 반대한 사람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강조하면서 ‘개혁 대통령, 안정(安定) 총리’라는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총리를 기용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는 국회가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이고 지방자치단체장의 절대 다수를 한나라당이 장악하고 있는 등 집권기반이 절대적으로 취약한 현실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노 당선자는 17대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정치권 개혁에 주력하되 경제 사회 분야 등 내정(內政)에 있어서는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오랜 공직경험을 갖고 있는 고 전 서울시장을 앞세우면 공직사회도 큰 마찰없이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노 당선자는 대선 후보등록 직전인 11월 말 후보단일화가 성사되자마자 고 전 시장의 협조를 얻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다. 고 전 시장이 민선 서울시장을 지낼 때 정무부시장으로 함께 일했던 신계륜(申溪輪) 비서실장을 보내 선대위 고문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으나 고 전 시장은 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럼에도 노 당선자는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고 전 시장을 일찌감치 총리감으로 염두에 두고 지난해 12월 말 총리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민주당 일부 중진의원들과 젊은층이 ‘개혁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노 당선자는 한때 새 총리감 물색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노 당선자는 자신의 동북아 중심국가 구상에 단초가 된 ‘영종도 신공항’ 아이디어를 창안했고, 국내 정보통신분야의 개척자인 오명(吳明) 아주대 총장을 대안으로 두고 고심했으나 최종적으로 고 전 시장을 선택했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고건 누구인가▼

흔히 ‘행정의 달인(達人)’으로 불리는 고건(高建) 전 서울시장은 3공에서 김대중(金大中)정권에 이르기까지 6개 정권에 걸쳐 요직에 기용됐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호남의 손꼽히는 명문가(家)에서 태어나 순탄하게 성장한 그는 경기중·고를 나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61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뒤 내무관료의 길로 들어선 그는 75년 37세의 나이로 전남지사에 임명돼 최연소 도백의 기록을 세웠다. 85년 12대 총선에서는 민정당 공천으로 전북 군산-옥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3공 때는 전남지사,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당시에는 대통령정무수석, 5공 시절 교통 농수산 내무장관, 6공에서는 임명직 서울시장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97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로 발탁됐고, 98년 6·4 지방선거 때는 김대중 대통령의 권유로 민선 서울시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6척 장신(長身)에 온화한 성품이지만 업무추진에 있어서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빈틈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38년 서울 청진동에서 출생한 그가 전북 옥구 출신으로 알려진 것은 부친 고형곤(高亨坤) 전 전북대총장을 비롯해 그의 조상이 대대로 옥구에 뿌리를 내려왔기 때문.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부친은 6대 국회 때 야당이었던 민정당 후보로 군산-옥구에서 출마해 당선된 적이 있으며 YS의 서울대 철학과 재학시절 은사이기도 하다.

고 전 시장은 관계에 입문할 때 부친으로부터 “남의 돈을 받지 말라” “누구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말라” “술 잘 마신다는 소문이 나지 않게 하라”는 세 가지 가르침을 받아 비교적 이를 충실히 지켜온 것을 오랜 관료생활을 모나지 않게 해온 비결로 꼽는다.

그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 서울시장으로 있으면서 정태수씨의 한보그룹에 수서아파트 건축허가를 내주라는 외압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경질되기도 했다.

시장 시절에도 일주일에 두세 차례는 지하철로 출퇴근하거나 동네 목욕탕을 찾는 등 서민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高씨 "내일 문상갈수 있을지…" 여운▼

노무현 정권의 첫 국무총리로 내정된 고건(高建) 전 서울시장은 20일 저녁 확인을 요청하는 취재진의 질문에 전날 밤 기자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할 말이 없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고 전 시장은 이날 서울 염곡동에 사는 98세의 부친 고형곤(高亨坤)옹에게 문안 인사를 드린 뒤 저녁 7시경 서울 혜화동 자택으로 돌아오다 기자들을 만나자 “저녁 식사나 같이 하자”며 근처 고깃집으로 안내를 했다.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했으나 기자들의 질문에는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대선 후에 노 당선자를 만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잠시 머뭇대다 “없다”고 했고, 전화통화를 한 적은 있느냐는 물음에는 “그만 하자”고 비켜갔다.

그는 그러면서 “시장 시절 공관 근처 대중목욕탕에서 노 당선자를 두세 차례 마주친 적은 있다”고 했다.

기자들이 직설적으로 “총리 내정 통보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는 “그런 것 없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제의를 받은 적은 있느냐”는 물음에는 “지금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말끝에 혼잣말처럼 “내일 문상 갈 일이 있는데 가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해 이미 내정 통보를 받고, 21일 그것이 공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던 고 전 시장은 기다리고 있던 카메라 기자들이 셔터를 눌러대자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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