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서해도발]함포에 맞은 '햇볕' 중대기로

  • 입력 2002년 6월 30일 19시 25분


서해 교전사태는 갖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속돼온 햇볕정책에 또다시 위기를 안겨주고 있다.

햇볕정책은 북한의 잠수정 침투, 연평해전 등으로 인해 추진단계에서부터 상처를 입었지만 ‘대안부재’란 정부의 논리적 설득력에 힘입어 여러 고비를 넘겨왔다.

햇볕정책에 첫 시련이 닥친 것은 98년 6월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방북 중이던 시기에 강원 속초 앞바다에서 발생한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 때였다.

정부가 햇볕정책의 그림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발생한 이 사건은 북한의 이중성 논란으로 우리 사회내부를 혼란에 몰아넣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당시 안보와 교류협력을 분리하는 ‘분리 접근’ 방식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논리로 위기를 넘겼다.

햇볕정책의 두 번째 위기는 햇볕정책의 옥동자로 불리던 금강산관광을 위한 배가 첫 출항한 98년 11월에 발생했다.

이는 금강산관광선이 첫 출항해 장전항에 머물고 있던 11월20일 북한 반잠수정이 강화도에 침투하려다 도주한 사건. 당시에도 논란은 있었으나 특별한 피해상황이 없어 흐지부지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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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정책의 발목을 결정적으로 잡은 것은 99년 6월의 연평해전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햇볕정책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활용되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북한 경비정을 대파시키는 등 승리를 거둠으로써 여론의 지지를 얻자 더욱 자신감을 갖고 햇볕정책을 밀어붙였다.

안보는 안보 논리대로 굳건히 세우면서도 남북 간의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서도 교류협력과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는 논리가 먹혔던 것이다.

물론 햇볕정책의 대표적 사업인 금강산관광이 중단되는 강경한 남북대립 상황도 있었다. 북한이 연평해전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직후인 99년 6월 말 금강산관광객 민영미(閔泳美)씨를 강제 억류시키자 정부는 처음으로 금강산관광을 중단시키는 강경한 대응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두 차례의 차관급회담이 결렬되자 남북 간의 최악의 대결을 피하자는 판단 아래 정부는 8월 초 일방적으로 금강산관광 재개 입장을 발표했다.

문제는 이번 서해교전의 파장이 과거 경우와 다르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햇볕정책의 최대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남북정상이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다짐한 상황 속에서 북한군의 일방적 포격으로 우리 군이 큰 피해를 보았다는 점에서 자칫 ‘6·15공동선언’의 신뢰감에까지 손상을 줄지 모른다는 우려마저 낳고 있는 것이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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