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인생역정

  • 입력 2002년 4월 28일 15시 20분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는 분명 30여년동안 한국 정치를 풍미해온 3김정치의 패러다임을 거부해온 이단아(異端兒)다.

3김이 두터운 지역주의의 성벽을 쌓아 올리며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할 때에 그는 이에 편승하지 않았다. 도리어 중요한 갈림길마다 이 거대한 장벽에 맞서 외롭고 집요한 싸움을 계속해왔다.

그는 2개월 전까지만 해도 별 가능성이 없는 대통령 예비주자의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노무현 돌풍 을 일으키며, 집권여당의 대통령후보로 비상(飛翔)한 데에는 정치 입문 이후 14년간 이단 으로 낙인찍혀온 숱한 도전과 좌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성장과정=노 후보는 1946년 8월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서 10리쯤 떨어진 본산리에서 빈농의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산리 마을은 가야시대의 왕자가 살았다는 자왕골 을 등지고 있다. 하지만 해마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가며 농토를 할퀴고 간 탓에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게 없어 울다 돌아간다 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척박한 산골마을이었다.

여느 마을 사람들처럼 노 후보의 부모는 산기슭을 개간해 고구마를 심어 겨우 생계를 꾸려갔고 취로사업에 나가 받은 밀가루와 몇 푼 안 되는 돈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은 늘 가난에 대한 열등감에 휩싸여있었고, 그런 열등감은 타협을 싫어하는 당돌함으로 나타났다.

노 후보 자신도 자전에세이(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성장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릴 때 나는 상당히 반항적이었고 한편으로는 열등감이 심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슴에 한과 적개심을 감추고 있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쉽게 좌절하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성장기 내내를 지배했던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키가 작아 돌콩 으로 불렸던 소년 노무현은 머리가 좋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여섯 살 때 천자문을 완벽하게 외워 마을에서 노천재 라는 별명을 얻었고, 학교 성적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반에서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범생은 아니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반항아였다.

3·15 부정선거 직전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우리 이승만 대통령 이라는 제목의 작문시간에 이를 거부한 것은 그의 반항아적 기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장이었던 그는 친구들에게 백지 동맹을 선동했고 자신은 백지에 우리 이승만 (택)통령 이라고 써냈다. 택도 없다는 뜻이었다. 이 일로 학교가 발칵 뒤집혔으나 그는 반성문 쓰기를 끝내 거부했다.

가세가 더욱 기울면서 인문계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부산상고에 진학했지만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방황기였다. 생활비가 없어 친구집을 전전했고, 어떨 때는 교실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웠고, 성적도 뚝 떨어졌다.

뒤늦게 취직시험 공부에 열을 올려 농협 시험을 봤지만 여지없이 낙방했다. 사회 진출의 첫 발이 헛나간데 따른 좌절감은 컸고, 그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요량에 울산의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도 부산대 법학과를 나온 맏형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사법시험 도전의 꿈은 놓치지 않았다. 사법시험은 가난과 그로 인해 상고 졸업으로 멈출 수 밖에 없었던 우울한 성장기를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필연적 선택이기도 했다.

71년 군 복무를 마친 뒤 고향 마을 뒷산에 토담집을 지어놓고 독학으로 본격적인 시험 준비에 나섰고 75년엔 꿈에도 그리던 사법시험(17회)에 합격, 수직적 신분상승에 성공했다.

뒤늦은 나이에 고시에 합격한데다 고졸 학력 때문에 사법연수생 시절 노 후보는 남과 어울리기 어려웠다. 한나라당 안상수(安商守) 의원(경남 마산 출신)이 고향이 비슷한데다 늦깍이로 시험에 합격했다는 점 때문에 노 후보의 유일한 벗이었다. 역시 사법시험 동기인 민주당 송훈석(宋勳錫) 의원은 연수원 시절 노 후보는 유난히 질문이 많았다. 그때도 문제의식이 강했던 것 같다 고 회상했다.

4월 임시국회에서 노 후보를 향해 공산주의자 라고 맹비난했던 한나라당 정인봉(鄭寅鳳) 의원도 노 후보의 사법시험 동기다.

노 후보는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관했지만 판사생활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8개월만에 변호사 개업을 했다.

▽정치인 노무현=부산 광안리 바닷가에서 취미로 요트를 즐기며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던 변호사 노무현 을 정치의 길로 이끈 인생의 전환점은 81년에 우연히 찾아왔다.

상고 출신으로 조세소송사건에 명성을 얻어가고 있던 노 후보는 선배변호사인 김광일(金光一)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소개로 부산지역 운동권 대학생들이 연루된 부림(釜林)사건 변론을 맡았다. 이 때 노 후보는 자신이 변론을 맡았던 대학생들과의 열띤 토론과정에서 왜곡된 사회구조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됐다.

이후 노 후보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공동변론을 맡은 고 조영래(趙英來) 변호사와 교류하며 인권 노동 변호사로 변해갔고, 85년부터는 변호사 업무를 제쳐놓고 본격적인 재야운동에 뛰어들었다.

노 후보가 처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숨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李錫圭)씨의 사인 규명작업에 나섰다가 3자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된 사실이 한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부터였다. 이 사건으로 변호사 업무 정지처분까지 받는 등 꽤 이름이 알려졌고, 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게 됐다.

여당의 센 사람과 붙겠다 고 고집해 부산 동구에 출마한 노 후보는 5공 신군부의 핵심인물이었던 민정당 허삼수(許三守) 후보와 맞붙어 1만여표 차로 승리했다. 국회에 진출한 노 후보는 88년 5공비리 청문회에서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그룹 회장, 장세동(張世東) 전 안기부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송곳같은 질문으로 궁지에 몰아넣으며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이후 정치인 노무현은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마다 김 전 대통령 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의 결별과 재결합이라는 애증의 궤적을 남겨왔다.

YS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노 후보는 90년 3당 합당 때 첫 시련을 맞았다. 탄탄대로가 보장된 거대여당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춥고 배고픈 소수야당의 길을 지킬 것인가라는 갈림길에서 노 후보는 주저없이 YS와의 결별을 택했다.

91년부터는 DJ가 이끌던 신민당과의 야권 통합운동에 나서 DJ와 통합민주당이라는 한 배에 탔다. 그러나 DJ 깃발을 들고 나선 92년 14대 총선에서는 허삼수 후보에게 고배를 마셔야 했고, 95년에는 부산시장 선거에 도전했으나 또다시 지역주의의 장벽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92년 대선에서 패배해 정계에서 은퇴했던 DJ가 4번째 대권 도전에 나서기 위해 통합민주당을 깨고 국민회의를 창당했을 때 노 후보는 야권분열 이라며 합류 제의를 거부했다. 이로써 양김과는 완전히 선을 그은 셈이었다. 그리고 96년 15대 총선에서 노 후보는 지역구를 서울 종로구로 옮겨 도전했으나 패배는 당연한 일이었다.

총선 낙선 후 노 후보는 김원기(金元基) 이부영(李富榮) 김정길(金正吉)씨 등과 국민통합추진위(통추)를 결성해 또다시 소수의 길을 걷다가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냐, 3김청산이냐 의 논란속에서 정권교체와 동서통합을 명분으로 DJ와 다시 손을 잡았다.

그래서 노 후보의 정치역정은 양김과 충돌하고 합류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노 후보는 자신만의 독특한 칼라를 만들어왔고, 대권을 향한 입신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노 후보의 개혁노선은 상당부분 DJ의 것과 일치하고,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정치스타일은 YS와 닮은 대목이 많다. 그래서 머리는 DJ에게서, 행동은 YS에게서 배웠다 는 평가도 받는다. 그 스스로도 DJ를 계승 발전하겠다고 공언하는 한편, 단번에 모든 것을 뒤집으려는 자신의 승부사적 기질에 대해선 타고난 성격도 있지만 한번 결단하면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자세, 승부수가 운명을 가른다는 직관과 결단은 YS에게 배운 것이다 고 말한다.

▽대권 도전에 나서다=3당 합당을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의 일원으로 있던 90년 9월 노 후보는 한 인터뷰에서 대권 도전 계획이 있느냐 는 질문을 받았다. 노 후보는 이에 대권이란 계획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역사가 결정하는 것이다 고 답했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노 후보가 대권 도전을 현실의 문제로 생각하게 된 것은 2000년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였다. 98년 7월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당선돼 오랜만에 두 번째 금배지를 달고 원내에 진출해있던 노 후보는 2000년 4월 총선에서 자신의 정치적 고향이면서도 적지(敵地)인 부산 출마라는 위험한 도박을 선택했다.

부산에서 DJ의 민주당 간판으로 승리하면 영남에서의 득표력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대권도 충분히 노려볼 만하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산은 빗나갔다. 초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한나라당 후보에게 여지없이 고배를 마셨다. 그럼에도 이 무모한 실패는 오히려 그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자리에 오르는데 중요한 자산이 됐다.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정치생명을 내건 그의 과감한 선택에 많은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고, 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이 인터넷을 통해 조직되면서 대권후보로 회생하는 활로를 열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정치초년병이었던 12년 전 스스로 말했듯이, 오는 12월19일 시대와 역사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숱한 좌절 속에서도 버리지 않았던 이단의 길이 한국 정치의 주류로 공인받을 것인지도 판가름날 것이다.

<김정훈기자>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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