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 2002]경제 바로세우려면

  • 입력 2002년 1월 3일 17시 58분


《지방 A시에서 공기업 발주공사를 주로 맡는 중소건설업체 사장 P씨는 보통 한 달에 한 두 번씩 서울에 올라온다. 그가 아까운 시간을 들여 상경하는 것은 ‘실세(實勢) 주변인사’를 만나 접대하기 위해서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적잖은 돈도 들어간다. P사장은 “시공능력만 뛰어나면 되지 왜 돈과 시간을 낭비하느냐”는 물음에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잘라 말했다. 웬만한 공사를 따려면 발주처와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든든한 ‘줄’이 없으면 어렵다는 설명이었다.

경제부문의 ‘페어플레이’를 정착시키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우선 실력과 경쟁이 아니라 지연 학연 혈연이나 권력과의 친소(親疎)관계 등 연고(緣故)에 의해 경제활동의 승패가 좌우되는(또는 좌우된다고 믿게 하는) 한국사회의 병폐를 청산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연고 자본주의’ 또는 ‘패거리 자본주의(Crony Capitalism)’가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부패를 동반하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또 국내외 기업간 역(逆)차별 논란 불식과 관치(官治)경제 청산,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거래의 공정성 확보도 시급한 사안으로 꼽힌다.》

▼글 싣는 순서▼

- ①공정한 정치 누가 막나
- ②여야의 주문과 다짐
- ③경제 바로세우려면
- ④불공정 사회풍토

▼연고와 부패로부터 벗어나야▼

현 정부는 출범 초 정경유착과 관치경제,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웠다. 또 기업을 권력의 사슬이나 비호에서 해방시키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공약(公約)이 지켜졌는지에 대한 평가는 차갑다.

▼관련기사▼

- "맘만 먹으면 혼자서도 주가조작"
- 존경받는 기업 없다…세계 50위내 한곳도 못올라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가 지난해 1월 실시한 국민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매매 거래 고용 계약 등 각종 경제활동에서 ‘연고’가 ‘경쟁’보다 중요하다는 응답이 49.3%로 ‘경쟁이 더 중요’(45.6%)를 웃돌았다.

96년 4월과 98년 11월 조사 때는 경쟁을 중시한 답변이 절반을 넘은 57%였던 것과 비교하면 ‘연고주의’가 심해졌다고 보는 국민이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최근 잇따라 터져 나온 각종 ‘게이트’는 경제활동을 좀먹는 연고와 부패의 사슬이 정권 차원에서의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로까지 이어졌다는 의혹을 갖게 한다.

정부가 조장하다시피 한 벤처과열 속에 주가조작과 한탕주의로 치달은 일부 ‘얼치기 기업인’, 또 지연 학연 등 사적(私的) 연고를 바탕으로 이들과 얽힌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등 권력층 인사의 모습에서 공정성을 찾기란 어렵다. 돈과 권력의 부적절한 거래가 이들만에 그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정부와 일부 대기업간 관계를 둘러싸고도 말이 많다. 한 기업의 임원은 “몇몇 기업에 대한 특혜성 지원이나 어떤 기업에 대한 행정제재조치가 과연 경제논리에 따른 것인지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아랫물’이 맑아진 것도 아니다. 일선 행정관서를 상대하는 기업의 경험을 들어보자.

지난해 수도권에서 몇건의 주택사업을 했던 P사 K사장의 말. “주택이나 주상복합아파트 등의 인허가를 받기 전에 당국에 대한 로비가 필수적입니다. ‘약’을 칠하지 않으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사업계획서를 반려시키는 일이 허다합니다.”

대형 건설업체 A사는 얼마 전 서울에서 오피스텔을 분양하면서 현장안전을 책임질 전문용역업체를 잘못 선정해 낭패를 당했다. 관할경찰서에서 “우리가 아는 업체를 소개해주겠다”고 해 받아들였지만 일이 터지자 무용지물이었다. 알고 보니 경찰출신이 퇴직해 만든 용역회사였다.

서강대 김광두(金廣斗) 교수는 “신상필벌원칙의 부재(不在)가 모럴해저드의 중요한 원인”이라며 “각종 연고주의와 불투명한 각종 제도, 이에 따른 부정부패가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었다”고 진단한다. 업무능력이 없거나 불성실한데도 끈만 잘 잡고 줄만 잘 서면 돈을 벌고 자리를 지킨다면 아무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역차별과 관치경제 해소해야▼

LG그룹 계열 인터넷포털업체인 ㈜심마니는 연간 매출액 40억원 규모의 ‘중소기업’인데도 제대로 투자를 할 수 없다. 반면 외국자본계 경쟁사인 야후코리아는 매출이 2배를 넘는데도 한국에서 마음껏 사업을 펼칠 수 있다.

부채비율 87%로 최대 경쟁사 신일본제철(부채비율 260%)보다 재무구조가 좋은 포항제철도 투자제한이 많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런 현실은 심마니와 포철이 단지 30대그룹 계열사란 이유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정부가 외국기업 투자유치에는 적극적인 반면 국내 대기업에는 지나친 규제를 한다고 보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丁文建) 전무는 “한국은 세계 각국 규제의 종합전시장”이라고 말한다.

정부 여당은 “대기업이 외환위기의 책임이 크고 경영 행태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며 ‘규제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심지어 기업규제의 완화요구를 ‘재벌논리 대변’으로 몰아붙인다.

외국기업이 한국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경제력집중 억제가 경제정책의 주요 과제였던 시대라면 이런 논리도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선진국 기업이 물밀 듯이 몰려 와 무한경쟁에 들어간 오늘날 한국에서 경제정책의 패러다임은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와 기업관계의 불평등도 바뀔 때가 됐다.

전경련의 손병두(孫炳斗) 부회장과 김석중(金奭中) 상무 등은 기업규제완화 등에 대해 몇 차례 ‘소신’을 밝혔다가 정부 당국자로부터 강도 높은 경고를 받았다. 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경제단체조차 ‘입 조심’을 해야 하고 기업이 신입사원 채용인원이나 직원 감축규모를 정할 때 정부의 눈치부터 살피는 게 한국의 현주소다.

김 상무는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임원들은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면 유무형의 압력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 익명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는다”며 “정부가 민간의 목소리를 더욱 열린 마음으로 듣는 풍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순활기자 shkwon@donga.com

황재성기자 jsonh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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