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법무 사퇴까지 긴박 43시간]"장관이 거짓말을…포기하자"

  • 입력 2001년 5월 23일 18시 54분


안동수(安東洙) 전 법무부장관의 ‘충성 문건’ 파문은 23일 오전 안전장관이 취임 43시간만에 물러남으로써 일단락됐다. 안전장관의 퇴진이 결정되기까지 청와대와 여당 등 정치권과 법무부 검찰에서는 긴박한 움직임이 계속됐으며 결국 안전장관은 ‘헌정 사상 최단명 장관’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등돌린 검찰-법무부▼

○…“모든 게 저의 잘못입니다. 제가 부덕한 탓이고 제가 직원 관리를 잘못한 탓입니다. 취임해서 열심히 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많습니다.”

23일 오후 2시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회의실. 안전장관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이임사의 운을 뗐다. 그러나 곧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마음속의 응어리를 토로했다.

“그 문건이 취임사에 사용된 것도 아니고, 컴퓨터에서 출력된 것도 아니고 입력만 된 것인데 (언론사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직원을 ‘꾀어서’ 입수한 문서가 나에 대한 공격 자료로 쓰였을 때 회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존경하는 대통령에게 누를 드리고 법무부 검찰 가족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생각에서, 또 제 문제가 정쟁의 불씨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책임자로서 사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법무부 대검의 간부들과 검사, 일반 직원 등 200여명은 착잡한 표정으로 안전장관의 ‘고별사’를 묵묵히 경청했다.

일부 참석자들은 오후 2시 25분경 안전장관이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청사를 떠나자 “휴”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관의 거취를 둘러싸고 22일 오후부터 절정에 오르기 시작한 긴박한 상황이 종료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법무부와 검찰의 ‘안장관 포기’ 상황은 22일 오후 7시경부터 시작됐다. 이 시간 법무부 청사 2층 김경한(金慶漢)차관실에는 21일 오후와 마찬가지로 실국장 5, 6명이 23일자 조간신문을 체크하기 위해 모였다.

실국장들은 문건을 작성했다고 주장해 온 이모 변호사와 이 문건을 언론에 배포한 여직원 윤모씨의 진술이 번복됐다는 보도에 주목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 자리에 있었던 한 검사장은 “문건 작성자가 안장관일 가능성이 있으며 검사들로서 이같은 의심을 가진 이상 일치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전했다. 이후 이들은 언론사에 대한 해명 작업을 중단했다. 다른 참석자는 이를 ‘검사로서의 양심’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각 대검차장인 신승남(愼承男)검찰총장 내정자 등 수뇌부도 청사에 모여 ‘안장관 본인이 결심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이에 따라 대검 및 서울지검 수뇌부는 오후 10시를 전후해 일제히 퇴근했다. 서울지검 수뇌부는 퇴근길에 청사 1층 로비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수고하라”는 취지의 말을 했을 뿐 기사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안전장관은 23일 오전 1시반경 서울 방배동 신삼호아파트 자택 앞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에게 처음으로 해명을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날 오전 안전장관이 청와대로 사퇴 표명을 하러 간 사이 법무부 관계자들은 “검사들도 누군지 잘 몰랐던 인사를 무리하게 장관에 임명한 것부터 잘못된 일”이라거나 “지역 안배라는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로 장관을 무리하게 교체하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뒤숭숭한 분위기는 23일 오전 10시 5분경 안전장관의 사표를 청와대가 수리했다는 긴급 뉴스가 TV에 보도되면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청와대-여권에서는…▼

○…안전장관의 사퇴 문제는 22일 오후 5시반경 한광옥(韓光玉)대통령 비서실장이 민주당 김중권(金重權)대표에게 긴급히 전화를 걸어 회동을 제의한 뒤부터 급부상했다는 후문.

시내 한 호텔에서 외부 인사를 만나고 있던 김대표는 잠시 자리를 빠져나와 한실장과 만났고, 두 사람간에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지 않느냐” “파문이 확산되기 전에 수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것.

이날 오후 민주당 박상규(朴尙奎)사무총장, 이호웅(李浩雄)대표비서실장이 안전장관과 직접 통화해 메모지 작성의 진위를 물었을 때 안전장관은 “메모지를 본 적도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언론에 문건을 작성했다고 주장했던 이모 변호사가 작성 시점에 골프장에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당내에서조차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

○…여권 핵심 관계자는 22일 밤 안전장관의 사퇴 문제를 묻자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라며 언론 보도에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다음 장관은 누가 됐으면 좋겠느냐”고 물어 사임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사퇴는 이날 아침 청와대 관저에서 열린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핵심 관계자들간의 구수회의에서 최종 결정됐다는 후문. 김대통령의 최종 재가가 떨어지자 청와대 관계자가 안전장관에게 전화해 자진 사퇴 형식으로 사표를 제출토록 모양새를 갖췄다는 전언이다.

<김창혁·신석호·이명건기자>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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