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이산상봉]통곡 대신 잔잔한 웃음

  • 입력 2001년 2월 27일 18시 51분


북측 유홍구씨 누나 손잡고 덩실덩실
북측 유홍구씨 누나 손잡고 덩실덩실
▼한결 차분해진 이산상봉▼

이번 이산가족 3차 상봉자들은 흥분과 오열로 가득했던 1, 2차 상봉과는 달리 한결 차분한 태도를 보여줘 대조적이었다.

26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센트럴시티 6층 밀레니엄홀에서 이뤄진 상봉에서는 1, 2차 때와 같은 ‘통곡에 가까운’ 오열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대신 참았던 눈물을 조용히 흘리는 이들이 보다 많이 눈에 띄었다.

울음보다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많이 들린 것도 특징. 가족들의 안부를 물으며, 혹은 반세기 전 고향에서 함께 뛰놀던 추억을 되살리며 환한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26일 센트럴시티에서 북의 오빠 정순석씨(67)를 만난 순남씨(61)는 북한 기자들이 상봉의 소감을 묻자 활짝 웃는 표정으로 “우리 오빠가 너무 예뻐졌어요”라며 오빠의 얼굴을 쓰다듬는 ‘애교’를 보이기도 했다. 정지용 시인의 셋째아들로 북에서 온 구인씨(67)도 이날 첫 상봉에서 여동생 구원씨(66)가 눈물을 보이자 “이런 기쁜 날 왜 우느냐”고 달래며 환한 모습을 보였다.

27일 오전 오후 두 차례의 개별상봉 때도 이런 분위기가 이어졌다. 상봉을 마치고 나온 남측 가족 대부분은 “옛날 함께 지냈던 추억을 즐겁게 나누고 왔다”며 밝은 표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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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만남이 비교적 차분해지고 ‘즐거워’진 것은 이산가족 상봉이 3차까지 이어지면서 이산가족들이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분석. 북에서 온 누나를 만났다는 한 이산가족은 “오히려 1, 2차 상봉 때 남들이 만나는 모습을 TV에서 보고 많이 울었다”며 “그런 경험을 미리 하고 나서인지 누나를 만났는데도 눈물보다 즐거움이 더 앞섰다”고 말했다. 북측 상봉단의 한 방송기자는 “1, 2차 때도 취재차 내려왔지만 가면 갈수록 분위기가 더 차분해지는 것 같다”며 “남북관계 개선으로 통일이 더 가까워지면서 이산가족들의 마음이 많이 안정된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이완배·박윤철기자>roryrery@donga.com

▼유복자 6명 첫 부자 상봉▼

“네가 내 아들 맞느냐?”

“아버지, 제가 용국이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면 어머니가 젊었을 때 고기장사해 아버지에게 금시계를 사주셨다는 말을 하면 아신다고 했는데….”

1·4후퇴 때 임신한 아내를 북에 남겨두고 내려와 생이별의 아픔을 겪었던 한형춘씨(73·부산 서구)는 26일 평양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아들 용국씨(50)를 만나 자신의 혈육인지 하나하나 확인해갔다. 언뜻 보기에도 영락없이 빼닮은 얼굴 탓에 부자지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한씨는 믿기지 않는 듯 연방 고개를 돌렸다.

한씨가 “혹시 호적등본은 떼왔느냐”고 묻자 아들은 “그런 것은 없다”며 대신 어머니 사진 등 북에서 가족들이 찍은 사진 30여장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설명했다. 한씨는 북에 두고 온 아내가 찍은 환갑사진을 보자 한참동안 쳐다봤다. 아들이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환갑을 한해 남겨두고 미리 환갑상을 차려드렸다”고 말하자 한씨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평남 강서가 고향인 정린서씨(80·서울 중랑구)도 이날 1·4후퇴 때 북에 두고 내려온 60줄에 들어선 딸들과 함께 낯선 아들 대선씨와 상봉했다. 당시 아내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남으로 내려왔던 한씨는 아들의 첫 인사를 받은 뒤 어색한 표정으로 “그동안 못봤으니 오늘이 처음이네”라며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3차 이산가족 남측방문단에는 이와 같이 부인이 애기를 가졌을 때 남으로 내려와 이번에 자식을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이 6명이나 된다. 이들은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생사확인 통보를 받을 때만 해도 새로 확인된 자녀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했으나 상봉장에서 자신을 빼닮은 자식이 그동안 ‘유복자’로 살아온 데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뱃속에 있던 자식이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른 채 아내와 헤어졌던 안준수씨(88)도 이번에 딸 선녀씨와 사위의 큰절을 받고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안씨는 “한번도 아버지 노릇을 못했는데…”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이 밖에 결혼한 지 2년도 안 돼 아내와 헤어진 김만수씨(79)도 임신 사실을 모른 채 남으로 내려왔다가 이번에 아들 명모씨를 만났고 이병식씨(82)도 아들 원주씨를, 김봉빈씨(80)도 딸 은복씨를 만나 혈육의 정을 확인했다.〈이철희기자·평양〓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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