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이산상봉]"국군포로 형이 살아있었네"

  • 입력 2001년 2월 27일 01시 21분


“돌아가신 줄만 알았습니다, 형님.” “그래, 그래. 그만 앉거라.”

정부가 국군포로로 파악하고 있던 형 김재덕씨(69)를 50년 만에 26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만난 김재조씨(65·경남 남해군)는 한순간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꿈에 그리던 형님을 눈앞에 마주한 흥분에 잠시 몸마저 굳어버렸던 재조씨는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형 재덕씨의 입을 벌려 치아를 확인했다.

그리고 던진 한마디. “맞구나, 맞아. 형님이 맞구나.” 재조씨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형제는 말없이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재조씨는 이어 “형님 눈 위에 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네요”라며 형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귀가 어두워진 형은 눈시울을 붉힌 채 “공화국 품에서 드디어 동생을 만나게 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재조씨가 형수, 조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북측 기자가 재덕씨에게 헤어진 동기를 물었다. 이에 재덕씨는 “남반부에서 미군이 전쟁을 일으킨 뒤 나를 괴뢰군대로 끌어가면서 헤어지게 되었다”며 “미국놈들이 쥐어준 총을 동족의 가슴팍에 댈 수 없어 인민군에 자원입대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념’에 의한 이산의 아픔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같은 자리에서는 또 한 사람의 국군포로 가족이 감격의 상봉을 나누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국군 국방경비대에 근무했던 국군포로 손원호씨(75·함경북도 회령시)를 동생 준호씨(67·경북 경주시)가 부둥켜안았다. 방북 때 북측 인사말이라고 배웠던 “반갑습니다”라는 말을 어색하게 되풀이했지만 감격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국가로부터 형에 대한 전사 통지서가 날아와 가족들은 원호씨가 이미 죽은 줄로만 알았고, 40여년간 제사까지 지내던 터였다. 전쟁 전 원호씨와 결혼한 형수는 수절한 채 혼자 살아가고 있다.

준호씨는 50여년간 끊겼던 남측 가족들의 소식을 전한 뒤 “북에서나마 아들을 둘이나 두고 행복한 가정까지 이루고 있다니 고마울 따름”이라며 “이번에 내려가면 형수에게 잘 살고 있다는 말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북측 관계자와 기자들이 지켜보자 원호씨는 인민군에 입대한 시절을 회고하면서 “민족의 일원으로 내가 걸어온 인생길은 참으로 옳았다”고 강변했다.

<하태원기자·평양〓공동취재단>scooo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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