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말씀 한마디에"…관료들 정책반영 고심

  • 입력 2001년 2월 23일 18시 41분


대통령이 각종 정책에 대해 발언한 내용을 관료들이 정책에 반영하느라 고심하고 있다. 특히 경제정책의 경우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려면 대부분 예산이 들어가므로 이를 추스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각 부처는 새해 업무보고에서 대통령이 지시한 주문을 챙기느라 대책을 내놓은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아 새 대책을 짜느라 부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장기적 차원에서 경제정책을 추진하기보다 수시로 떨어지는 대통령 지시를 꿰맞추느라 단기정책이 양산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결과적으로 정책의 큰 틀이 뒤틀리는 사례가 많다는 것.


▼관료들 "흉내라도 내야"▼

이미 시행됐거나 실현가능성이 없는 대책들도 ‘대통령 말씀’이라는 이유로 그럴듯하게 포장되는 경우도 있다. 정부 과천청사에서는 고위 관료들이 “대통령 지시사항인데 어떡하나”라며 “당장 대책을 짜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며 실무자들을 다그치고 있다.

▽대통령 지시로 실업대책 한달만에 새로 수립〓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이달 6일 4대부문 개혁실적을 점검하는 회의에서 “경제부총리가 나서서 특별 실업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경제부처에서는 재정경제부를 중심으로 연일 회의를 가지며 부산을 떨었다. 노동부가 지난달 16일 이미 종합실업대책을 확정해 2조9000억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상태에서 또 대책을 만든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1950억원이 더 들어가는 실업대책을 23일 추가로 내놓은 것.

대책을 보면 대부분 기존 발표내용에 대해 수혜대상자를 늘린 짜깁기식 성격이 강하다. 제목도 특별대책이 아니라 보완대책으로 명패를 바꿔 달았다. 재경부는 대통령 지시후 실업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추가경정 예산을 짤 생각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예산을 편성한 지가 엊그제인데 연초부터 추경 타령이냐”는 지적 때문에 고강도 대책을 내놓지는 못했다.

▽연기금 동원 증시부양 무리수〓8일 증권사 사장단 120명을 청와대로 초청했을 때 대통령은 “연기금 주식투자비중을 빠른 시일안에 대폭 늘리겠다”고 장담했다.

이기호(李起浩) 경제수석은 “4대 연기금 주식투자비중을 2∼3년안에 20%수준(25조원)으로 늘리고 우선 올해안에 6조∼7조원 가량 투자규모를 늘리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오찬에 참여한 한 증권사 사장은 “연기금 주식투자가 장점도 있지만 문제점도 많다”며 “장단점을 세심하게 살핀 뒤 발표했는지 의심스럽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실무책임자인 임종룡(任鐘龍) 재경부 증권제도과장은 “연기금 주식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제도를 고치고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이 브리핑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것 같다”며 ‘25조원 확대’라는 발언에 대해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대통령 발언후 한나라당은 물론 여당내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걱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담뱃세 올초에 올랐는데"▼

▽담뱃세 또 올려야 하나〓1월 31일 보건복지부의 업무보고 때 재경부 세제실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대통령이 “담배를 안 피게 하는 것이 국민건강에 좋다”며 “담배세제를 개편하는 것을 검토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미 1월 1일부터 담배에 세금이 더 물려져 갑당 100∼300원씩 올라 애연가들의 불만이 한창 쌓여있을 때였다. 행정자치부에서는 바로 외국의 담배세금을 조사하고 나섰고 담배소비세를 올리는 방안을 다각도로 강구했다. 재경부에서는 “올린다 해도 내년에 가서나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대통령 지시에 곤혹스러워했다.

▼"청와대지시 모양새 안좋아"▼

▽전문대 수업연한 3년으로 하라〓대통령은 20일 충청대 졸업식에서 전문대 학과중 교육과정 운영상 필요한 학과는 수업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들은 “대통령이 전문대 교육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실무 부처에서 검토할 일을 언급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교육계 안팎에서는 “중학교 의무교육 확대도 청와대가 발표하는 등 교육문제를 ‘한건 올리기’식으로 다루는 것은 곤란하다”는 반응이다.

대통령은 지난해 2월 “지방대 우수학생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지방대학 육성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지방대육성대책위가 구성돼 위원회 회의 5회, 실무추진반 회의 9회, 권역별 세미나 4회, 공청회 1회를 거쳐 12월 육성책이 발표됐다. 하지만 실무자조차 “내용이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공허했다는 평가다.

▽대통령 발언에 관료들은 ‘예스맨’〓대통령의 이런 말에 ‘노(No)’라고 대답할 수 있는 관료가 거의 없다는 게 문제로 지적된다. 재경부의 한 관료는 “대통령 지시라도 현실성이 없는 경우 정책에 반영하지 않아야 하는데 ‘한국적 상황’에서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최영해·이인철기자>money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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