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입 말고 원로로 남길" 이부영총재 YS에 공개서한

  • 입력 2000년 10월 22일 18시 51분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부총재가 22일 정치재개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는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에 대한 공개서한을 통해 ‘현실정치 개입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부총재는 4쪽 분량의 공개서한에서 “지난날 민주화 운동 속에서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왔던 후배이자 동지의 한 사람으로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얼마전 지성과 토론의 전당이라는 대학의 정문 앞에서 봉변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며 운을 뗐다.

▼"과거 대범한 모습 벗어나"▼

이부총재는 5공시절 23일간의 단식투쟁, 86년 직선제 개헌투쟁, 94년 남북정상회담 합의 등 YS의 ‘공로’를 상찬한 뒤 “그러나 요즘 행보는 국민이 기억하고 있는 대범한 지도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다”고 안타까움을 피력했다.

그는 또 YS가 추진하고 있는 ‘김정일(金正日) 답방반대 서명운동’과 관련해 “한반도의 상황은 이제 유럽국가들도 북한과의 수교를 시작하는 등 평화의 제도화 단계에 이르고 있다”며 “과거의 냉전구도로 회귀하려는 듯한 행보로 인해 그동안의 업적까지 부정되는 상황이 초래될까 심히 염려된다”고 고언(苦言)했다. 이부총재는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97년 대선 패배 당시 각하의 역할을 뼈아프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 대선패배에 대한 ‘YS의 책임론’을 지적했다. 양김의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의 타파를 주장한 이부총재는 또한 “원로이자 정신적 지주로 남아야 할 분이 현실정치에 개입하면 우리 정치를 다시 대립과 갈등의 나락으로 추락시키게 되지 않을까 심히 두렵다”며 “각하께서 그와 같은 ‘적절치 않은’ 역할을 또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부총재는 “이회창(李會昌)총재가 YS의 정치재개에 대해 ‘무대응’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침묵만이 능사는 아니다”면서 “이총재에게 상의했더니 ‘가만히 있는 게 어떠냐’고 만류했지만 김전대통령과 우리 정치의 미래를 위해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개인적 서한을 내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전대통령의 대변인격인 박종웅(朴鍾雄)의원은 “일절 대응하지 않겠다”며 언급을 자제했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공개서한 전문

김영삼 前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서한

어느덧 오곡백과가 풍성하게 결실을 맺는 계절로 접어들었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라며, 이렇게 글월로나마 안부 인사를 전해 올립니다.

어려움에 처한 요즘의 상황을 살펴보시면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를 역임했던 국가의 원로로서 나라의 장래와 운명에 대해 수많은 고뇌와 번민이 있으실 줄 압니다. 외람되게도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이 그러한 고민의 무게를 더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민주화 운동 속에서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왔던 후배이자 동지의 한 사람으로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에 몇 자 적어 올리는 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서한은 제가 속한 한나라당의 당론과는 상관없이 각하의 최근의 동정에 대해 꼭 한 말씀 드려야한다고 생각하는 한 시민의 입장에서 올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지성과 토론의 전당이라는 대학의 정문 앞에서 봉변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 최고의 원로가 후학들에게 경륜과 식견을 전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국민들의 탄식을 자아내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처럼 참담한 현실을 대하며 많은 생각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먼저 70년대와 80년대를 돌이켜 봅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 '김영삼'이라는 이름 석자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들에게는 곧 '희망'과 동의어였습니다. 앞장서서 선명 야당을 이끌며 벌였던 박정희 정권과의 끈질긴 투쟁, 철옹성 같던 전두환 정권의 폭압 통치에 금을 가게 했던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 투쟁, 닭장차로 끌려가고 최루탄 연기를 뒤집어쓰며 시민들과 함께 했던 86년의 직선제 개헌투쟁과 87년의 찬란했던 6월 항쟁, 이 모든 과정은 우리 국민들에게 민주화 운동의 신화이자 상징으로 깊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어느 누가 뭐라해도 우리 역사는 그처럼 국민과 뜻을 함께 하고, 한발 앞서 그 뜻을 실천했던 모습에 대해 '민주화운동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한 시대를 이끈 개혁의 기수 김영삼'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특히 저는 최근 남북관계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반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셨던 모습,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셨던 일을 기억해 봅니다.

지난 1979년 제1야당인 신민당 총재 시절, 대결과 전쟁 위험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과감하고도 당당하게 김일성과의 회담을 제안하신 바 있습니다.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던 시절, 그러한 제안은 참으로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정권으로부터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하고, 야당 총재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수모와 고통을 당하셨지만, 현명한 국민은 부마(釜馬) 민주항쟁으로 그 뜻을 지켜주었고,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난 1994년, 한반도의 정세는 참으로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핵 개발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북한의 충돌 위험은 고조되었으며, 급기야는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북한측 협상 대표자의 발언으로 국민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이루어진 남북 정상회담 합의는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화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불안에 떨던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각하께서는 남북 문제의 전개 과정에서 전향적인 입장을 지켜옴으로 써 한반도의 화해와 협력에 기여하셨으며, 국민들은 그러한 대범한 지도자의 풍모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보여주시는 행보는 우리 국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대범한 지도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듯 합니다. 한반도의 상황은 이제 남북관계의 진전을 넘어, 북미, 북일 관계가 진전되고 유럽 국가들도 북한과의 수교를 시작하는 등 다자간 협력에 의한 평화의 제도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대립과 갈등의 냉전 구도로 회귀하려는 듯한 행보로 인해 화해와 협력에 기여해 오셨던 업적까지 부정되는 상황이 초래될까 심히 염려됩니다. 저를 비롯한 국민들은 진실로 한반도의 화해와 협력에 기여하는 원숙한 국가 원로의 모습을 정말 절실하게 보고 싶습니다. 항상 국민의 뜻과 함께 하셨듯이, 그러한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각하와 김대중 현 대통령께서는 반독재투쟁을 통해 이 나라의 민주화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셨으며, 두 분 모두 대통령이 되어 한 시대를 주도했고, 주도하고 계신 분들입니다. 두 분 모두 현실 정치의 큰 산맥을 이루셨던 분들인 만큼 높은 업적만큼이나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의 깊은 음영을 드리웠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두 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허물을 이해하는 우리 국민들은 이제 두 분의 시대가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를 끝으로 마감되고, 두 분의 좋은 뜻을 이어받을 수 있는 새로운 세대가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큰 원로이자 정신적 지주로 남으셔야 할 분께서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우리 국민들은 실망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실망과 안타까움이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로 표출되어 우리 정치를 다시 대립과 갈등의 나락으로 추락시키게 되지않을까 몹시 두렵습니다.

제가 지금 몸담고 있는 한나라당은 지난 9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분들과 많은 양식 있는 국민들은 당시 각하께서 하셨던 역할을 지금도 뼈아프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원로의 위치를 지켜야 할 분께서 다시 현실 정치의 세계로 내려와 그와 같은 적절치 않은 역할을 또 다시 반복하시지 않기를 정말로 절실하게 기원하며, 부디 각하께서 다시 한 번 국민과 함께 하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의 자리를 위엄있게 지켜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고언의 말씀 전해 올리는 뜻을 다시 한 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라며, 안녕과 건승을 기원합니다.

2000년 10월 22일

이 부 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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