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는 총선쟁점이 ‘독재-반(反)독재’로 양극화됐었고 87년 ‘6·10’ 항쟁 이후 다원적인 이해계층의 분화(分化)가 정착되기도 전에 ‘1노(盧)3김(金)’으로 상징되는 지역대결구도가 뿌리내림으로써 정책공방이 끼어들 ‘틈새’가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각 정당도 공약의 ‘포장’에만 몰두할 뿐 별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
실제로 여야 각당의 당직구조를 보아도 사무총장, 원내총무 등 ‘정쟁(政爭)의 주역’들은 각광을 받는 반면 민생현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정책담당자들은 별다른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해왔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 선거현실에서 정책이나 공약이 차지하는 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책이나 공약은 각 정당의 정체성과는 거의 무관한 것으로 인식되고, 정당의 무책임성과 유권자들의 불신이 가속화돼온 게 우리의 정치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정치퇴행현상은 헌정사상 처음이라는 97년 정권교체 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당의 전신인 국민회의가 15대 총선과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던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세청장 등 ‘빅4’에 대한 인사청문회 도입을 여권이 끝내 거부한 것이나, 15대 대선 때 금강산 관광개발지원 등 대북화해협력정책 추진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한나라당이 야당이 된 후에 금강산관광까지 반대하는 것 등이 대표적 사례.
공약이 후보당락을 가름하는 판단근거가 되지 못하자 유권자들도 공약에 별반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실제 올 연초 한 여론조사 결과 총선투표 때 고려사항으로 후보의 선거공약을 꼽은 사람은 15.5%에 불과한 반면 ‘후보의 인물됨’은 63.5%로 나타났다.
<이동관기자>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