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의원 구인시도 파문]野 "전면전 선포행위"

  • 입력 2000년 2월 12일 02시 53분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에 대한 검찰의 체포 시도가 총선 정국에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김대중(金大中)정부 출범 이후 현 정부의 비리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 폭로해 여권을 궁지로 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정의원을 사법처리하려는 것 자체가 한나라당의 정보수집기능을 마비시키려는 것이라는 게 한나라당의 주장. 더구나 정의원이 김대통령의 셋째아들 홍걸(弘傑)씨 관련 의혹 제기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이날 갑작스러운 강제연행의 배경이 됐다고 보는 게 한나라당측 시각이다.

한나라당은 검찰의 정의원 구인 시도가 총선을 앞두고 여권이 전면전을 선포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여권이 민감한 시기에 정의원을 구인하려는 것은 단순히 정의원 개인에 대한 사법처리가 아니라 한나라당의 대여 투쟁의지를 꺾기 위한 수순이라는 게 한나라당의 분석이다.

이처럼 한나라당이 정의원을 적극 보호하면서 거의 당운(黨運)을 걸다시피하고 결전의지를 보임으로써 총선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미상태로 빠져들 것이 분명하다.

이같은 한나라당의 강경대응에 서울지검도 발칵 뒤집힌 분위기였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일선 검사들은 “지금 이 시점에 갑자기 왜 이런 일이…”라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정의원에 대한 검찰의 임의동행 또는 긴급체포 시도는 이처럼 검찰 내부에서도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통상의 법집행 절차’라는 게 검찰수뇌부의 설명이다. 임승관(林承寬)서울지검1차장은 이날 밤 “정기국회 회기가 9일로 끝나 임의동행 또는 긴급체포를 위한 요건이 갖춰져 소환조사 시도를 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의원에 대한 이같은 검찰의 구인시도를 ‘통상적인 법집행’이라고 보는 시각은 별로 많지 않다. 이보다는 오히려 검찰을 넘어선 ‘통치권 차원의 판단’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결국 이 사건이 이미 정치적 사건으로 인식돼 있고 또 검찰의 ‘법집행’ 형식도 다분히 정치성을 띠고 있어 ‘법적인 해결’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차수·이수형기자> kimcs@donga.com

▼ 鄭의원 인터뷰 ▼

11일 밤 검찰수사관들의 구인에 불응하며 자택 안방에서 대치하고 있던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검찰이 나를 소환하려는 것은 한나라당의 총선전략을 좌절시키기 위한 무리한 음모”라며 “절대로 검찰의 구인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사관들이 집에 찾아온 경위는….

“밤 10시 조금 넘어 집에 도착하니 수사관 10여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구인장이 발부됐으니 동행하자고 요구했다. 일단 집에 들어가서 영장 내용을 자세히 보자고 얘기하고 수사관들과 집으로 함께 들어갔다. 변호사와 상의한 뒤 구인에 응할지를 결정하겠다고 안방으로 들어온 뒤 당과 변호사들에게 연락했다.”

―구인장은 어떤 내용이었나.

“서경원(徐敬元)간첩사건 언론문건사건 등 내가 고소된 사건이 모두 나열돼 있었다.구인장 내용으로 볼 때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검찰이 왜 갑자기 구인하려 한다고 생각하나.

“여권은 이신범(李信範)의원이 폭로한 김대중대통령 막내아들의 호화주택 거주 의혹의 배후에 내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내가 여권이 이회창(李會昌)총재 아들의 병역면제를 문제삼으면 한나라당도 맞대응할 수 있다고 얘기한 것을 이렇게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총재와는 연락이 됐나.

“이총재와 통화했다. 이총재는 걱정하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하라고 나를 위로했다. 이총재는 거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나는 법적인 문제도 없고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 내가 죽든지, 현 정권이 굴복하든지 막다른 골목에서 대치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언론대책문건을 폭로한 뒤 그동안 여권 핵심부의 비리를 많이 알고 있었지만 자제해 왔다.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김차수기자> kimcs@donga.com

▼ 鄭의원 강제구인 현장 ▼

16대 총선 공천으로 분주했던 정가는 11일 밤 벌어진 검찰의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 체포작전으로 긴박감과 파란으로 얼룩지며 파열음에 휩싸였다.

○…이날 밤 10시10분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으로 귀가하던 정의원에게 서울지검 특수부와 공안부 수사관 10여명은 체포영장 사본을 보여주며 “검찰로 가셔야 한다”고 강제 구인 의사를 밝혔다. 이에 정의원은 체포영장 사본만 받아든 채 집으로 들어가 안방문을 걸어 잠그고 구인에 불응.

뒤따라 들어온 수사관들이 정의원의 체포를 저지하는 가족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 정의원 자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이날 정의원 자택에는 정의원의 동생들이 와 있었으며 이들은 정의원이 피신해 있는 안방 문앞에 대형 책장으로 바리케이드를 쳐 체포를 막았다. 수사관들은 “오늘 밤 안으로 무조건 구인하겠다”고 강한 체포 의지를 피력했으나 정의원과 가족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정의원은 안방에 들어가서 “도망가려는 것 아니니 걱정 말라”고 말한 뒤 당 지도부와 언론사에 연락했다. 정의원은 먼저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원내총무에게 상황을 보고했으며 이총무는 이회창(李會昌)총재에게 보고했다.

이총재는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공천심사 중인 당 3역 등 지도부에 연락, 비상연락체제를 가동했다. 정의원은 한편 선거운동차 부산에 가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신범(李信範) 김영선(金映宣)의원 등 대여 강경파들에 도움을 요청했다.

○…밤 11시경 정의원의 전화를 받고 달려간 이신범의원은 수사관들에게 “소속을 밝히라”며 신분증을 요구. 이의원은 “한나라당 의원을 모두 잡아가라. 군사정권 시절에도 이러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면 한나라당 의원이 모두 모일 것이다”며 고함을 쳤다.

하순봉(河舜鳳)사무총장 이경재(李敬在)의원 등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당 관계자들도 수사관들에게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고 항의. 홍준표(洪準杓)전의원도 뒤늦게 도착해 수사관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검찰의 지원 요청에 따라 추가로 들이닥친 수사관들은 정의원의 측근, 한나라당 의원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며 계속 정의원의 강제연행을 시도했으나 자정이 넘도록 정의원측의 저지선을 뚫지 못했다.

○…정의원에 대한 체포 시도 소식이 알려진 밤 10시반부터 정의원의 집 앞에는 언론사 취재기자와 카메라기자 등 30여명이 몰려들어 수사관들과 정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간 한나라당 관계자들 사이의 대치상황을 취재했다.

거실에서 수사관들과 밀고 밀리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왼쪽 손을 부상하기도 한 정의원의 둘째딸 혜경씨(21)는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법석을 떠는 지 모르겠다”며 “이러면 야당탄압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 것”이라고 분개했다.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는 이날 밤 임승관(林承寬)1차장검사 정병욱(丁炳旭)공안1부장 등 검찰간부들이 저녁식사를 중단하고 청사로 돌아가는 등 급박한 분위기였다.

지난해 11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 1만달러 수수의혹사건과 관련해 정의원 소환에 실패했던 서울지검 공안1부는 파견 수사관이 정의원과 정의원 자택에서 대치하는 등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자 소속검사들과 긴급 구수회의를 열고 대책을 숙의했다.

<박제균·신석호·이완배기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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