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탈출 일가]김경태씨 인터뷰

  • 입력 1996년 12월 7일 09시 30분


일가족을 이끌고 탈북해 한국행을 앞두고 있는 金慶鎬(김경호)씨의 맏형 慶太(경태)씨는 『동생이 살아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 심정은…. 『50여년 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경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 다른 형제들은 모두 죽어 경호가 나의 유일한 혈육인데 한시라도 빨리 만날 수만 있다면 뛰어가서라도 보고 싶다. 경호를 제일 아꼈던 여동생 貞順(정순)이가 살아있다면 아마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앞으로 동생과 함께 살 것인지. 『나야 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하지만 동생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니 동생과 상의해서 결정하겠다』 ―동생이 살아있다고 생각했었나. 『형제들 모두 동생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례를 지낼 때면 언제나 동생의 밥을 떠서 올리곤 했었다』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가. 『해방직후 19세때 군에 자원입대한 뒤 지금의 육군본부 근처에서 근무할 당시까지만 해도 이태원에 살던 경호를 가끔 봤다. 그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돼 서울을 떠난 이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 사이에 전쟁이 터져 동생을 비롯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동생을 찾지는 않았나. 『53년경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 바로 아래동생 慶白(경백)이에게 경호의 안부를 물었다. 경백이는 경호가 미군부대 근처에 살아 평소 미군장교들과 잘 어울렸으니 미군장교를 따라 미국에 입양돼가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라고 했다』 ―형제관계는…. 『아버지 김제우씨와 어머니 李金女(이금녀)씨 사이에 4남1녀가 있었다. 내가 장남이고 아래로 경백(76년 폐암으로 사망), 정순(96년 2월 사망), 경호, 慶熙(경희·88년 사망)가 있었다』 ―현재 생활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 불광시장내 상가건물의 가게를 개조한 3평짜리 단칸방에서 아들(興錫·흥석·33), 손자(仁善·인선·7)와 셋이서 살고 있다. 지난 10월 26일 죽은 아내(李海淑·이해숙)가 이곳에서 한복장사를 했었다』 ―동생이 북한에서 도망나와 홍콩에서 귀순을 요청했다는 뉴스를 들었는가. 『뉴스는 봤지만 내 동생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남인 줄 알고 아주 장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낌은 어땠나. 『죽은 사람이 살아왔다는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릴 때 어디서 살았나. 『줄곧 서울 이태원에서 살았다』 ―아버님은 뭘 하셨나. 『왜정때부터 이태원에서 군부대를 상대로 빵을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래서 내 별명이 「빵집아들」이었다』 ―경호씨에 대해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어릴때 용산역 직원인 「모리모토」라는 사람이 소위 「바리깡」으로 경호의 머리를 깎아주고 면도까지 해 주자 동생이 생전 처음 해본 면도가 부끄러워 창피해 하던 일이 기억난다』 ―동생의 특징이나 성격은…. 『또렷또렷하고 얌전했으며 나를 많이 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6.25이후로는 어떻게 살아왔나. 『전쟁중 왼쪽 무릎관절을 다쳐 상이군인으로 제대했다. 제대한후 부산에서 이것저것 장사를 하다가 20년전 서울에 올라와 약수동에서 목수일을 했다. 그러다 관절이 너무 아파 10년전 목수일을 그만두고 지금까지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생계는 어떻게 유지했나. 『아내가 한복일을 해 먹고 살았으나 아내마저 지난 10월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 지금은 자가용 운전사를 하고 있는 아들, 손자와 함께 살고 있다』 〈宋平仁·金靜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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