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달파라, 北에 가 소식없는 아들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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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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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조사단, 사할린 강제 징용 2세 동포 실태조사
“1960년대 北서 대학 보내 준다기에 너도나도 보내”

2일 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한인회에서 만난 서순녀 할머니가 자식들과 헤어져야 했던 사연을 얘기하고 있다. 함께 인터뷰했던 
손모 할머니는 사진촬영을 거부했다.유즈노사할린스크=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2일 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한인회에서 만난 서순녀 할머니가 자식들과 헤어져야 했던 사연을 얘기하고 있다. 함께 인터뷰했던 손모 할머니는 사진촬영을 거부했다.
유즈노사할린스크=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사할린에서 광복을 맞은 우리 가족 중 부모님과 동생들이 북한으로 가면서 이산가족이 됐어.”

2일 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의 한인회에서 만난 손모 할머니(76)는 광복 이후 사할린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가족들과 생이별한 아픔을 서툰 한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손 씨는 자신의 이름이 한국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꺼렸다.

손 씨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사할린 징용노동자였다고 한다. 이후 가족은 아버지를 찾아가 사할린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았지만 가족은 다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소련 대학 입학을 거부당한 남동생은 “대학 진학 기회를 주겠다”는 북한의 선전에 솔깃했다. 1959년 북한으로 간 남동생이 평양의 미술대학에 들어갔지만 졸업 후에도 북한은 그를 사할린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아들이 걱정됐던 부모님은 1963년 북한에 귀화 신청을 했다. 여동생도 2년 뒤 북한으로 갔다.

“사할린에서 만난 남편과 자식이 있던 나만 사할린에 남게 되면서 이산가족이 된 거야. 북한이 1972년 관광을 시켜주며 13년 만에 가족들 상봉 기회를 줬지만 이후에 얼굴을 보지 못했고, 오고 가던 편지도 1980년경에 끊겼지.”

이후 손 씨는 “부모님과 남동생 모두 죽었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며 “여동생은 (북한)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고 탄식했다.

손 씨를 비롯한 사할린 한인들은 “당시 북한에 유학 간 아이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도망쳐 나오다가 변을 당했다는 소식도 자주 들었다”고 했다. 같은 한인회에서 만난 서순녀 할머니(83)도 1962년 무상으로 대학에 보내준다는 북한 측 선전을 믿고 아들과 딸을 북한에 보냈지만 이후 생이별을 해야 했다.

서 씨는 “북한에 가서 자식들을 몇 차례 봤지만 1998년이 마지막이었다”며 “그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처음에 왜 보냈겠나. 자식과 손자들 얼굴이 아른거린다”고 울먹였다.

이날 인터뷰를 주선한 국회 사할린 동포 실태조사단은 3일 러시아 사할린국립대에서 사할린 강제징용 관련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나라당 박진, 민주당 김영진,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주최하고 재외동포재단이 주관한 이 행사엔 러시아 동포 300여 명이 참석했다.

유즈노사할린스크=류원식 기자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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