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기자의 사람이야기]김영희 前세르비아 대사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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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는 이유 찾으면 이미 진것… 긍정-열정 앞에 좌절은 없다”

대한민국 여성 대사 3호 김영희 전 세르비아 대사가 지난 시절을 회고하며 활짝 웃고 있다. 고교 졸업 후 야간대를 다니다 독일로 건너가 간호보조원이라는 밑바닥 생활을 거쳐 명문 쾰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 대사까지 지낸 그는 노력, 집념, 열정을 통해 좌절을 기회로 바꾼 전형적인 성공 법칙을 따랐다. 원대연 기자
대한민국 여성 대사 3호 김영희 전 세르비아 대사가 지난 시절을 회고하며 활짝 웃고 있다. 고교 졸업 후 야간대를 다니다 독일로 건너가 간호보조원이라는 밑바닥 생활을 거쳐 명문 쾰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 대사까지 지낸 그는 노력, 집념, 열정을 통해 좌절을 기회로 바꾼 전형적인 성공 법칙을 따랐다. 원대연 기자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공통점이 있다. 남들이 다 옳다고 믿는 상식에 과감하게 맞서 도전한 적이 있으며 좌절과 실패를 맛봤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련이 닥칠 때마다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탄식 대신 ‘이 일은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찾아온 것일까’ 생각하며 배우려고 애썼다.

가난한 집 9남매 막내딸로 태어나 대학도 가지 못했지만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파독(派獨) 간호보조원(현 간호조무사)을 거쳐 쾰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사(大使)까지 지낸 전직 외교관 김영희 씨(61)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일하고 싶어 좀이 쑤신다”고 했다.

최근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책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작은 사진)’를 낸 그를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집에서 만났다. 과연 나이를 잊게 하는 목소리와 열정의 소유자였다.

―열심히 일하다 그만두면 퇴직 후 증후군으로 힘들다던데….

“처음엔 괴로웠다. 스케줄이 꽉 찬 생활로 매일 오후 11시, 12시 퇴근이 기본이었는데 일이 없으니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기분이랄까. 더구나 내게 한국은 가족 외에 연고가 없는 곳이어서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잠이 안 와 베란다에 나가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며 ‘지금 이 시간에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며 힘을 얻곤 했다.”

―이제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나.

“퇴직 후 대학에 강의를 나가면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스펙’(학점 토익점수 대외활동 등 구직과 관련한 각종 자격증)이 아니라 진정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어떤 시련이 와도 꺾이지 않겠다는 의지나 자신감을 갖는 것인데 그런 게 부족해 보였다. 내 인생은 좌절과 비주류로 점철한 삶이니 그들에게 뭔가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낳아준 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찾고 싶다.”

공무원 그만두고 독일로 떠나
간호보조원 일하며 박사학위


그의 말대로 그의 삶은 좌절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좌절은 대학 진학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총 200명을 뽑는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 1만 명의 응시자 중 9등으로 합격했다. 중구청 민원실 호적 업무가 첫 업무였다. 그리고 이듬해 야간 대학 국문과에 입학한다.

“일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은 힘든 시절이었다. 돈도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오후 11시가 넘은 시간에 지은 밥으로 그날 저녁, 다음 날 아침, 점심 도시락까지 해결했다. 연탄불도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며 겨울 한 철을 나곤 했다.”

그러던 그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찾아온다. 우연히 친구로부터 독일에서 일할 간호보조원을 뽑는다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인 것.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버린다. 그런데 정작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거친 일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받은 모욕이었다.

“간호사도 아니고 보조이다 보니 사람 대접을 제대로 못 받았다. 나도 엄연히 자존심이 있는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싶어 견디기 힘들었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후에 1972년 8월 독일 하노버와 함부르크 사이 ‘웰첸’이라는 작은 도시 시립병원 간호보조원으로 독일 생활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형외과 환자들을 맡았는데 때로는 각종 보조기구를 몸에 매단 100kg이 넘는 남자들의 몸을 씻기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김 전 대사는 “그런 밑바닥 경험 덕분에 나중에 어지간한 시련 앞에서는 기죽지 않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자신보다 못한 상대라 해서 무시하지 않는 인간관계의 배려도 익혔다. 자신의 삶이 성공할수록 밑바닥 삶의 실체와 고통이나 슬픔을 이해하는 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쾰른대 입학허가서를 받은 과정도 극적이다.

“병원 일과 야간학교 수업을 병행하면서 입학 서류를 작성해 대학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돈이 없어 밤 기차를 타고 내려 노숙인들 틈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외국인 학생 담당 입학처장을 만났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독일에 온 목적은 무엇이고 앞으로 꿈은 무엇인지 열심히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지원서를 낸 쾰른대에서 가장 먼저 입학허가 통보가 왔다.”

그는 ‘박사가 된 다음엔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공부에 매달렸다고 한다. 예비과정부터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10년 동안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남들이 “독하다”는 소리를 할 때면 “독하지 않고 어떻게 꿈을 이룰 수 있나” 반문하며 보낸 10년이었다.

지식과 경험을 조국을 위해 쓰고 싶었던 그는 1986년 초 일시 귀국한 적이 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립대 한 곳과 국립대 한 곳에서 교수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사립대 총장이 “야간 대학 다닌 사람이 대학교수 하면 사람들이 웃는다”고 거절한 것. 국립대에서도 강의 자리를 구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독일로 돌아갔다.

“돌이켜보면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한국에서 자리를 잡았다면 외교관이 될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쾰른대에서 ‘전공과목을 강의한 최초의 외국인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바야흐로 학자의 길을 걷는가 싶던 그의 삶이 또 한 번 바뀐다. 다름 아닌 독일 통일 때문이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10월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주독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 외무부(현 외교통상부)에서 급히 독일 전문가를 찾은 것이다. 모집 공고를 보는 순간 ‘화살이 심장에 박히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는 그는 다시 한 번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10대 시절부터 꿈꾸었던 외교관 일에 도전한다. 1991년 3월 ‘구주국 서구과 서기관’이 첫 보직이었다.

외교관 꿈 이루려 교수직 사표
젊은이들 더 강한 의지 가지길


―마흔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려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낳아준 한국, 그리고 정신적으로 나를 키워준 독일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의 편견이었다. 비고시 출신 별정직 공무원에 여자인 나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옷차림, 말투,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는 눈초리들도 많았다.”

1년 반 서울 근무를 마치고 마침내 독일 대사관에서 일을 시작하자 물 만난 물고기가 되었다.

“독일 통일 이후 당시 한국에서는 국회의원 장차관은 물론 좀 심하게 말하면 이름 석 자 가진 사람들은 모두 다녀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료 작성, 통역, 각종 섭외 등 일이 너무 많았다. 그때까지 18년간 독일에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던 경험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빨리 출근하고 토요일도 없이 일했다. 외교통상부 정보상황실장을 맡았을 때에는 오전 4시에 출근하는 날도 많았다.

그동안 많은 성취가 있었지만 독일축구협회 관계자들을 설득해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지지를 얻어낸 것이나 세르비아 대사 재직 시절, 한국이 코소보(1990년대 처참한 내전을 겪으며 세르비아에서 독립한 자치지역 중 하나) 독립을 승인한 것과 관련해 양국 관계가 악화될 뻔한 위기를 잘 극복해낸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일류대 출신이 아니어서, ‘백’이 없어서, 집이 가난해서 등등 ‘안 되는 이유’를 먼저 찾는 사람은 이미 그 상황에 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즐겁게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꿈도 독일어로 꾼다는 그는 30년 이상 살아온 독일 문화에 빗대 아직은 한국 사회가 여러모로 고칠 게 많다고 꼬집는다. 요즘 제일 관심이 가는 분야는 교육 문제다. 무엇보다 ‘대학진학률 80%’를 깨지 않고서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독일의 대학진학률은 40%대다. 그나마 절반이 중도하차한다.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수백 개 직업학교에서 배출된 다양한 전문가들이 사회를 지탱한다. 아무리 산업구조가 고도화된 나라라 해도 대졸자가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생각의 거품’을 빼지 않고서는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갈 수 없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선진국 시민의 삶’은 어떤 것인지 물었다.

“예측 가능한 삶이다. 또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다. 휴식을 낭비가 아니라 충전으로 여기는 사회다. 여기에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는 사회다.”

이어 “우리는 너무 우리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우리 같은 압축성장이 아닌 200∼300년의 역사를 통해 선진국을 이룬 나라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 특유의 한국을 보는 냉정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달리 말하면 비주류와 아웃사이더로 출발한 삶을, 세상을 끌어안은 긍정의 힘으로 바꾼 김 전 대사가 앞으로 한국 사회에 발신할 새로운 에너지를 기대하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네 살 연하 남편과 만난 지 15년 만에 청혼받아 결혼▼

김영희 전 대사는 마흔넷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남편은 쾰른대 재학시절 만난 네 살 연하의 미국인 유학생. 현재 미국의 한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 전 대사는 미국 대학의 교수로 있는 남편과 방학 때만 같이 있는 방학부부다. 만나는 시간이 짧지만 엽서나 e메일로 자주 소통한다. 그는 젊은 커리어우먼들에게 “외모나 조건보다 서로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 서로 가는 길에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그가 공개한 결혼 스토리도 극적이다. 유학 시절 사랑을 확인했으나 학업을 마치면 곧 미국으로 돌아갈 남자 쪽에서 주저한 것. 남편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7년 동안 특별한 날 카드를 보내는 사이에 불과했지만 김 전 대사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다 마침내 청혼을 받았다. 처음 만난 지 15년 만이었다고 한다.

김영희 전 대사

1949년 전북 전주 출생
1968년 전주여고 졸업
1969∼71년 서울시 중구청 근무(9급 공무원)
1972∼75년 독일 웰첸 시립병원 근무
1981년 독일 쾰른대 교육학석사
1986년 철학박사
1986년10월~1990년 7월 쾰른대 교육학과 강사
1991년3월~1992년7월 외교부 구주국 서구과 서기관
(1991년~2002년 대통령 독일어 통역담당)
1992년7월~1995년 11월 주 독일 대사관 1등 서기관
1995년11월~1999년2월 〃 정무참사관
1999년2월~2000년7월 외교통상부 장관보좌관 겸 정보상황실장
2000년7월~2005년 8월 주독일 대사관 공사참사관, 공사
2005년8월~2008년 9월 여성 대사 3호로 주세르비아 대사(몬테네그로 대사 겸직)
2009년3월부터 전주 우석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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