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131>‘愛人敬天’ 도전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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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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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 맡다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여경련) 8대 회장을 지낸 고 허복선 회장(왼쪽)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여러 차례 찾아와 장영신 회장에게 여경련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장 회장이 1997년 1월 열린 9대 회장 취임식에서 허 회장에게서 여경련 기를 받고 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여경련) 8대 회장을 지낸 고 허복선 회장(왼쪽)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여러 차례 찾아와 장영신 회장에게 여경련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장 회장이 1997년 1월 열린 9대 회장 취임식에서 허 회장에게서 여경련 기를 받고 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부산에서 제일중기공업을 운영했던 허복선 회장은 씩씩하고 활동적인 분으로 당시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여경련)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여러 번 나를 직접 찾아와 “여경련이 어려워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나에게 연합회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여성 경제인이 정보를 나누고 친목을 다지기 위해 1977년 설립된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원장 최경자)이 여경련의 전신이다. 이후 단체 이름이 한국여성경제인실업회로 바뀌었다가 1980년 다시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었다. 허 회장은 8대 회장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여성 경제인에 대한 인식이 막 확산되고 있었다. 1996년 7월 6일 통상산업부 장관, 정무2장관, 중소기업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여성경제인의 날 행사가 열린 이후 매년 7월 6일을 ‘여성 경제인의 날’로 지정해 지금까지도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그러나 여경련은 남성 위주의 기업현장에서 외롭고 힘이 없는 여성 기업주끼리 서로 의지하며 어려운 문제나 사업상 고민 등에 대해 의논하는 친목 모임 성격이 강했다.

허 회장은 이런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회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 자신도 어렵게 회사를 운영해본 터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성 경제인을 모른 체할 수만은 없어 고민스러웠다.

여경련 회원인 여사장 대부분은 지금 기준으로는 중소기업에 해당된다고도 볼 수 없는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경제단체라기보다는 친목단체에 가까웠다.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나에게 이런 여경련을 맡아 달라는 제안은 한편으로는 엉뚱하게 느껴졌지만 오죽하면 그럴까 싶었다.

나는 숙고하고 숙고한 끝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움을 주자는 결정을 내렸다. 내가 여자로서 기업을 이끌며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른 고려사항을 떠나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었다. 또 예전부터 나이 60세가 되면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제 그때가 왔다는 판단도 들었다.

여경련 회장직을 맡겠다는 결심을 회사에 알리자 예상대로 임원들의 반대가 거셌다. 애경이 이제 자리를 잡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은 회장이 관심을 밖으로 돌릴 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해 새로운 사업을 찾아나서야 할 매우 중요한 기로에 있다는 얘기였다. 화학 분야는 공장을 증설하고 종합기술원 설립을 추진하는 등 조직을 키워가고 있었고, 유통 분야는 1995년 수원민자역사를 완공한 데 이어 평택민자역사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해야 할 회장이 회사 일을 돌볼 시간에 체계도 갖추어지지 않은 외부단체를 맡는다면 회사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회사 도약기에 외부 일 큰부담
女사장들 어려움 알기에 나서
“이제 봉사할 때 됐다” 판단도

실제로 나는 다른 모든 일을 제치고 회사 일에 미쳐서 살았다. 매일 오전 5시 전에 깨어나 기도를 하고 비서보다 일찍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주말이나 연휴에는 아예 작정을 하고 지방을 돌았다.

명절 연휴에는 이른바 ‘몸뻬’ 스타일의 헐렁한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전남 목포시 여수시 순천시, 경남 진주시 등 평소에는 바빠서 가지 못했던 남부지방을 돌아다녔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국토 끝까지 차를 타고 내려가 크고 작은 슈퍼마켓을 다니며 애경 세제나 샴푸가 어떻게 진열되고 어떻게 팔리는지, 고객의 반응은 어떤지 세심하게 살펴봤다.

명절 연휴에 지방으로 시장조사를 떠난 속사정에는 최고경영자로서 현장경영의 의지를 임직원에게 보이는 동시에 자식들, 특히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내가 서울에 있으면 아들과 딸, 며느리가 나를 챙기느라 연휴 동안 자신의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회사 안팎의 사정이 이러한데 여경련 회장을 맡겠다고 하니 임원들의 반대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반대하는 임원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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