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대행과 김종필총리]『썩 어울리지 않는 사이』

  • 입력 1999년 7월 12일 19시 25분


‘가까이하기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

국민회의 이만섭(李萬燮)신임 총재권한대행과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의 관계는 지난 30여년간의 엇갈리는 정치이력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오랜 정치생활 동안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시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늘 편치 않은 관계였다.

다소 다혈질인데다 할 말을 참지 못하는 것으로 소문난 이대행, 그리고 말을 극도로 아끼면서 느긋하게 처신하는 JP…. 이렇듯 스타일부터 다른 두 사람은 줄곧 ‘소원한’ 관계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5·16쿠데타 직후. 당시 JP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이었고 이대행은 박정희(朴正熙)최고회의의장과 최초로 단독인터뷰에 성공하는 등 맹활약했던 동아일보 정치부기자였다. 이대행은 JP가 공화당 사전조직사건 등으로 첫 외유를 떠나자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외유’라는 묘한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이대행이 63년 6대 공화당 전국구의원으로 나선 뒤 두 사람은 한 배를 탔지만 가까워지기 어려웠다. 64년 6·3사태가 일어나자 당시 초선의 이대행은 당의장인 JP에게 “일보 후퇴하라”고 권고, JP의 당직 사퇴와 2차 외유를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 모두 박정희대통령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JP는 명실공히 권력의 2인자였고 이대행 역시 김재규(金載圭)씨가 중학교 은사였던 관계로 자주 청와대 술자리에 참석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박대통령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3선개헌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당초 두 사람은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JP는 박대통령과의 독대 이후 개헌쪽으로 선회했고 이대행은 3선개헌의 선행조건으로 이후락(李厚洛)청와대비서실장과 김형욱(金炯旭)중앙정보부장의 퇴진을 제안, 모진 풍파를 겪기도 했다.

79년 10·26사태 이후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JP가 공화당총재로 취임하자 이대행은 “떳떳하게 직선으로 대통령에 출마하라”며 ‘체육관선거’에 반대했다. 이후 신군부의 등장으로 JP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긴 정치적 침묵에 들어갔고 이대행은 구 공화당과의 ‘승계와 단절’을 기치로 한국국민당을 창당, 야당총재로 나선다.

두 사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87년 JP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였다. 국민당의원 6명이 공화당으로 옮겨가고 다음해 총선에서 이대행도 낙선하면서 국민당이 공중분해된 것. 이대행은 뒷날 “외국에 나가 있다가 남들이 피를 흘려가며 민주화를 쟁취하니까 미국에서 돌아와 대선출마를 한 것”이라고 JP를 비판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은 92년 14대 총선 당시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민정당 전국구에 이대행을 배정하는 과정에서 김종필씨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데서도 드러난다. 이대행은 12일 JP와의 관계에 대해 “나쁘지 않다. 존중하는 사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앞으로 두 사람 사이가 이 말처럼 될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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