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극복 지도자/대처 前英총리]신념 강한「철의 여인」

  • 입력 1997년 11월 28일 20시 20분


《「경제의 신탁통치」를 받게 된 국난(國難)속에서 15대 대선이 치러진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여는 막중한 책임을 질 지도자를 뽑는 국가적 대사(大事)이기도 하다. 우리 국민도 이제 「자랑할 만한 대통령」을 가질 때가 됐다. 활력이 넘치며 미래가 밝은 나라에서 살 때도 됐다. 선진국이란 지도자나 국민 모두 오랜 세월 고통과 인내, 피나는 노력끝에 이루어진 나라다. 특히 지도자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사에 남는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어떻게 국난을 극복하고 위기를 관리하며 국가를 선진국으로 이끌었을까. 국민이 함께 호흡하며 동참하도록 그들이 보여준 지도력 용기 열정 비전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현대세계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난국을 극복해낸 알려지지 않았던 지도력을 찾아 조명해 본다.》 80년대 초 영국의 별명은 「유럽의 병자」였다. 유럽의 어느 나라도 파업으로 날이 새고 저무는 영국을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다. 마침내 83년 적자를 기록하고 있던 20개 석탄채굴회사의 문을 닫아버림으로써 촉발된 마거릿 대처 총리와 탄광노조의 대결로 영국은 먹구름 속에 잠겼다. 전세계도 「철의 여인」 대처총리와 74년 히스정권을 몰락시켰던 최강 노조인 탄광노조와의 싸움을 주시했다. 탄광노조의 파업은 생존권이 걸린 문제였기에 그만큼 거칠었다. 대처총리도 「법의 지배」 원칙아래 단호히 대응했다. 「여기서 밀리면 파국(破國)」이라고 국민을 설득했다. 우선 석탄수요업체에 비축령을 내려 경제마비요인을 줄인 뒤 불법파업현장에 경찰력을 집결시켜 근로자들의 불법행위를 가차없이 분쇄해 나갔다. 파업은 1년간 계속됐지만 대처는 「독선에 빠진 늙은 암소」 「냉혈한」 등 악평을 받으면서 단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노조는 1년 뒤 완패를 선언했다. 「영국병」의 처방으로 제시됐던 「대처리즘」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국은 70년대를 거치면서 국가가 떠맡은 복지부담 때문에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교수는 영국을 한마디로 「희망없는 국가」로 혹평했을 정도였다. 「영국병」을 치유하는 대처의 일관된 처방전은 자율과 창의, 효율성을 유도하는 「자유」였다. 이는 79년4월의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부터 90년 메이저총리에게 넘겨줄 때까지 외쳤던 신념이고 비전이자 철학이었다. 「개인을 국가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기업을 정부와 노조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정부를 복지부담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당시의 영국 국민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보살펴주는 보호막 속에 안주, 국가전체가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일하지 않고도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국가는 복지비용충당을 위해 개인과 기업들로부터 1백원을 벌면 최고 83원까지 세금으로 걷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근로의욕은 상실됐다. 생산성은 떨어지고 기업은 도산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물가는 오르고 정부의 재정부담은 천정부지로 늘어갔다. 대신 노조는 「국가속의 국가」로 묘사될 정도로 그 힘이 막강했다. 툭 하면 파업이었고 「클로즈드숍」제도로 인해 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면 취직조차 할 수 없었다. 노조를 모태로 한 노동당 정권은 영노동조합협의회(TUC)와 회의를 거친 뒤에야 결정 정책을 할 정도로 유약했다. 영국민은 이같은 사회분위기에 염증을 내며 국가가 거덜나는 게 아닌가 우려했다.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파업」이란 영국병을 반드시 고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집권에 성공한 대처는 『웅변은 남에게 맡기고 나는 행동만 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먼저 개인과 기업에 대한 중과세를 축소해 세율을 최저 30%, 최고 60%로 완화했다. 복지의 몫도 과감히 줄여나갔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해 자율경쟁을 유도했다. 공직사회 등 각 부분에도 개혁의 메스를 들이댔다. 후유증으로 실업이 급증했지만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불법파업은 가혹하리 만큼 규제하고 클로즈드숍 제도를 폐지했으며 노조의 비밀투표를 보장, 만성적인 파업에 쐐기를 박았다. 그 덕으로 79년 연간 파업횟수가 2천8백회에 달하던 것이 90년대에 들어와서는 2백회 이하로 떨어졌다. 그는 대신 일자리 만들기와 직업윤리의 확립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의 노력은 사회 전체에 활력과 생명감을 불어넣으면서 대영제국의 「지는 해」를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국민은 83년과 87년의 두차례 총선에서 압도적 지지로 보답, 그에게 윈스턴 처칠에 이어 3연속 집권이란 영예를 안겨줬다. 오늘날 「대처리즘」은 정치학 교과서의 한 장(章)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정책노선은 바로 「자유」에 바탕을 둔 신념과 이를 추진한 매서운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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