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손효림]소극장 문화의 상징 학전, 계속 달리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17일 23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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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난-김민기 대표 투병으로 33년만에 폐관
소극장 존재 의미, 방향 짚은 후 대책 세워야

손효림 문화부장
손효림 문화부장
“연애할 때 아내에게 보여준 작품이에요. 덕분에 점수를 딴 것 같아요.”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15일 한 중년 남성이 웃으며 아내를 바라봤다. 손에 뮤지컬 ‘지하철 1호선’ 티켓 두 장이 있었다.

학전이 경영난과 김민기 학전 대표(72)의 위암 판정으로, 개관한 지 33주년이 되는 내년 3월 15일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마지막 공연을 보려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불이 꺼졌다. 1998년 11월 서울역, 약혼자를 찾아온 연변 아가씨 ‘선녀’가 커다란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온다. 그래, 이렇게 시작하지. 지하철 1호선을 배경으로 고단한 인생을 아등바등 살면서도 때론 서로 보듬어주는 인간 군상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찡하게 그린 작품. 선녀 역을 뺀 모든 배우들이 일인다역을 하며 무대를 열기로 꽉 채우는 그 시대의 풍속화. 대학생 때 처음 본 후 참 좋아 세 번을 더 봤다.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이 출구 좁은 계단에 죽 서서 관객들을 배웅해준다. 소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정겨운 광경이다.

학전 측은 폐관 소식이 알려진 뒤 쏟아진 뜨거운 관심에 놀란 분위기였다. 격려를 위해 전화로 혹은 직접 방문해 표를 사는 이들이 많다. 내년 2월 말부터 박학기, 동물원, 유리상자, 시인과 촌장 등 학전과 인연 있는 가수들이 릴레이 콘서트를 연다고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는 지원 방침을 밝혔다. 학전 관계자는 말했다.

“그동안에도 지원을 많이 받았지만 버틸 수 없었어요. 등받이도 없는 불편한 좌석에, 가격은 영화관보다 비싼 소극장 공연을 보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지금 저희에게 제일 중요한 건 마지막까지 무사히 공연을 마치는 거예요.”

‘지하철 1호선’ 개막 4일 차인 이날 사무실 화이트보드엔 ‘무사고 3일 차!’라고 쓰여 있었다. 직전 공연 후 쓴 듯했다.

1991년 문을 연 학전에서는 동물원, 들국화, 안치환 등이 콘서트를 했고 김광석은 데뷔 10주년 기념 공연을 열었다. 다음 달 31일까지 공연되는 ‘지하철 1호선’은 1994년 초연 후 2008년까지 약 4000회 공연해 70만 명 넘게 관람했다. 황정민 조승우 설경구 김윤석 장현성 나윤선 등 스타를 대거 배출했다. 뮤지컬 ‘의형제’로 1999년 제3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받았다. 뮤지컬 ‘고추장 떡볶이’, ‘우리는 친구다’ 등 어린이 공연에 힘쓴 건 “처음 보는 공연이 좋아야 안목을 갖출 수 있다”는 김 대표의 철학에 따른 것이다. 모내기할 모를 기르는 논이 되겠다며 김 대표가 세운 학전(學田)은 이름처럼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학전의 폐관은 단순히 소극장 하나가 문을 닫는 게 아니다. 작지만 옹골찬 작품을 탄생시키고 배우, 제작자, 스태프를 길러낸 문화의 풀뿌리인 소극장 시대가 저물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묻는다. 지금 이 시대, 소극장은 필요한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광석이 기타 치며 노래하는 모습을 새긴 학전 앞 노래비에는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있었다. 노래비는 김광석이 1995년 학전에서 1000회 콘서트를 한 것을 기념해 세웠다. 노래비 앞에는 종종 소주 한 병,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행복하세요.”

노래비에 새겨진 김광석의 말이다. 삶의 태도에 대한 얘기지만 한편으론 소극장을 살리자고 목소리를 높이기에 앞서, 그 존재의 의미와 방향을 차근차근 짚어보라는 당부처럼 다가왔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
#소극장 문화#경영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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