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성열]형사소송법 개정이 낳은 이상한 법정 풍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21일 23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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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열 사회부 차장
유성열 사회부 차장
2010년 12월 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법정. 건설시행사 한신건영 대표 한만호 씨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9억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1심 2차 공판이 열렸다. 당시 법조팀 소속이었던 필자는 한 전 총리의 1심 재판을 법정에서 취재했다.

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한 대표는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넨 사실이 있느냐”는 검찰 질문에 “어떤 정치자금도 제공한 적 없다”며 검찰 조사 진술을 뒤집었다.

법정은 발칵 뒤집혔다. 한 전 총리 측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고, 한 전 총리의 측근으로 함께 기소된 김모 씨는 피고인석에서 실신해 구급차에 실려갔다. 재판장이 몇 번 호통을 치고 나서야 법정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 전 총리 측 변호인이 나서 “8개월이 지나 왜 진술을 바꿨느냐”고 물었다. 한 씨는 “내 허위 진술로 존경의 대상이었던 한 전 총리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했고 기소까지 당했다. 죄책감에 목숨을 끊을 생각도 했지만 이대로 죽으면 한 전 총리의 누명을 벗길 수 없다고 생각해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다”며 울먹였다.

한 씨의 진술 번복으로 한 전 총리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한 씨의 ‘법정 진술’보다 ‘검찰 조서’가 사실관계에 더 부합한다는 점을 법정에서 입증해 나갔고, 한 씨를 위증죄로 기소했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는 “한 씨의 진술이 번복됐더라도 다른 증거들에 의해 혐의가 인정된다”며 한 전 총리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고, 대법원도 원심을 확정했다.

13년이 지난 지금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재판에선 비슷하면서도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이 전 부지사는 검찰 조사에서 대북송금 사실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게 보고했다는 취지로 진술했지만, 최근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를 통해 “검찰로부터 지속적 압박을 받으면서 이 대표가 관련된 것처럼 일부 허위 진술을 했다. 이 대표에게 어떠한 보고도 한 적이 없다”고 번복했다.

이 전 부지사가 번복한 진술을 유지할 경우 검찰 조서는 휴지 조각이 된다. 과거엔 피고인이 검찰 조서를 재판에서 부인하더라도 적법 절차 등 일정한 요건만 갖췄다면 증거로 인정됐다. 하지만 지난해 1월 개정 형사소송법이 시행되면서 피고인이 재판에서 인정할 때만 증거로 채택할 수 있게 됐다. 검찰은 이 대표 측이 조서를 무력화하고 이 대표를 겨냥한 수사를 차단하기 위해 이 전 부지사를 회유하고 ‘사법 방해’를 시도했다고 보고 있다.

아내와의 갈등과 변호인 선임 문제로 한 달 이상 공전됐던 대북송금 재판은 진술 번복과 사법 방해 논란이 이어지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올 3월 이 전 부지사가 외국환거래법 위반으로 기소된 지 6개월이 지나도록 사건 규명이 제자리걸음인 이유다. 법정 진술을 최우선시하고 공판 중심주의를 구현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검찰 조서가 이렇게 쉽게 증거 능력을 상실한다면 재판은 한없이 길어지고 실체적 진실 규명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시행 2년이 돼 가는 만큼 제도적 보완 방안은 없는지 국회와 정부가 머리를 맞댈 시점이다.



유성열 사회부 차장 ryu@donga.com


#형사소송법#개정#법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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