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끼를 입으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광화문에서/유성열]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8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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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열 사회부 차장
유성열 사회부 차장
“제가 후배들에게 늘 강조하는 게 있어요.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입은 조끼가 쪽팔리지 않게 행동해야 합니다.”

노동계 원로 A 씨는 조합원 123만 명(2021년 기준)의 국내 최대 상급단체인 한국노총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과거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노동조합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끼를 입고 팔뚝질을 한다”며 “그렇다면 그 조끼를 입는 순간부터 사회적 책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끼는 노동운동의 상징이다. 노조 조끼엔 ‘금속노련’ ‘전교조’ 같은 연맹·산별노조의 이름이 적힌다. ‘노동개혁 철퇴’ 같은 구호를 담기도 한다. 양대 노총 간부들은 최저임금위원회 등 각종 정부위원회에 조끼를 입고 참석한다.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의원의 경우 한국노총 위원장이던 2017년 10월 청와대를 방문해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조끼를 입었다. 현대차 등 기업노조 간부들은 조끼를 맞춰 입고 임금 협상장에 들어간다. 조합원들은 조끼를 입고 집회에 참여한다. 연대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조끼 자체가 노동운동의 수단이자 노조의 정체성인 셈이다.

A 씨가 ‘조끼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조끼가 노동운동을 상징하고, 노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조끼를 입고 사회적 책무를 저버린다면 대중이 외면할 것”이란 게 그의 지론이다. A 씨는 “대중이 외면하는 노조는 설 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드러나는 ‘조끼의 속살’은 부끄럽다 못해 참담할 정도다. 노조가 권력화되고 자정 기능을 상실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노조 간부들이 돈을 주고받는 정황이 담긴 녹취록이 폭로됐고, 건설업계는 노조 간부들이 ‘채용 장사’로 부를 움켜쥐는 ‘블루 오션’이 됐다. 그럼에도 노조는 살림살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걸 꺼린다. 회계 감사를 제대로 받으라는 정부의 요구에 대해 “노조를 굴복시키려는 의도”라고 비판한다. 설령 그 주장이 맞더라도 회계 장부를 제출하지 않겠다는 노조의 태도가 순수해 보이진 않는다.

2005년 현대차 노조가 조합원 812명을 대상으로 ‘채용 비리와 노조 혁신에 관한 의식 조사’를 했다. 당시 응답자의 73.6%는 “노조 간부와 대의원이 입는 빨간 조끼가 순기능을 잃고 권력화의 상징이 됐는가”라는 질문에 동의하며 조끼를 없애는 데 찬성했다. 조합원들은 △전현직 노조 간부의 해외연수 폐지(80.5%) △노조 간부의 차량출입 특혜 폐지(70.3%) △대의원 명찰 폐지(60.3%) 등에도 찬성했다.

노조의 조끼는 이미 그때부터 본래의 뜻을 잃고 있었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헨리 4세’에서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고 썼다. 왕정 시대의 권력에도 막중한 책임감과 사회적 책무가 따른다는 뜻이겠다. 그렇다면 조끼를 입으려는 자 역시 그 무게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노조가 국민들에게 보여줄 사회적 책무의 첫걸음은 조끼의 무게를 견디며 어디서든 공명정대하게 처신하는 것이다.


유성열 사회부 차장 ryu@donga.com
#노동운동#노조#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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