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소비 대신 ‘경험 소비’[2030세상/김소라]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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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라 요기요 마케터
김소라 요기요 마케터
내가 처음으로 산 명품 가방의 값은 당시 한 달 치 월급과 비슷했다. 후회하지 않았다. 쾌적한 장소에서 잘 만들어진 물건을 대접받으며 사는 것, 고가의 물건을 들고 다니는 것, 모두 즐거운 일이었다.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하거나 한심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그 좋은 기분을 느끼려 이후로도 명품을 몇 개 더 샀다. 신기하게도 어느 시점에선가 명품을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멈추게 되었다. 이미 사놓은 것들도 옷장에서 꺼내지 않은 지 오래다.

‘오픈런’과 ‘플렉스’라는 신조어가 일상화된 시대다. 오픈런은 명품 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서 사는 것, 플렉스는 비싼 물건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다. 용어가 생겼을 정도니 누군가는 아직 명품을 소비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명품에 무관심해진 특정 그룹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성과급이 들어오면 으레 명품을 샀던 내 친구들이 그렇다. 어제 만난 친구 A는 “요즘은 명품 쇼핑 이야기가 아예 화제에 오르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친구도 나도 편한 옷에 보통 샌들을 신고 있었다.

이전에는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학생은 학생처럼, 회사원은 회사원처럼,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처럼 자신을 꾸몄다. 몇 년 전부터 그 경계가 무너졌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명품 브랜드를 입는 사람이 있고, 수십억 원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CEO가 평범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는다. 회사원인 나도 몇 년 전까지는 좋은 구두에 좋은 가방을 들고 출근했지만, 요즘은 운동화에 오래된 에코백을 메고 회사에 간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명품은 사회적 지위의 영역이 아닌 기호의 영역이 됐다. 이 정도 나이면, 이 정도 소득 수준이면 명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희미해졌으니 명품 수집가가 아니라면 명품을 소비할 이유가 없다.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알고 지낸 B는 항상 유명 명품 시계를 차고 다녔다. 하지만 최근 만났을 때는 그 시계가 사라져 있었다. 요즘 시계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고, 그 사이 시계가 고장이 났는데 방치하고 있다고 했다.

명품 소비 대신 사람들은 값비싼 경험에 돈을 쓴다. 미식(美食)이 대표적이다. 나와 B 모두 비싼 물건을 안 산 지는 몇 년 됐지만 그를 가끔 만날 때는 좋은 레스토랑에 간다. 예전보다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의 가방을 들고 만나면서도 한 끼에 쓰는 돈은 이전의 대여섯 배가 넘는다. 우리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다. 한 끼에 수십만 원은 하는 오마카세나 파인 다이닝의 인기 또한 이러한 경험형 소비 풍조에서 온다.

경험 소비 시장의 확대는 시장 성숙의 증표로 여겨진다. 그러나 요즘 한국은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제 자신의 경험 소비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파악하기 어려울 뿐, 이제 사람들은 SNS에 경험 게시물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가진 여러 가지 매력 요소를 예전보다 조금 더 미묘하게 표현한다. 나를 표현하고픈 마음은 같되 표현 방법이 더 다양해진 세상이다. 인기 레스토랑에서의 미식 경험과 포스팅이 이 시대의 명품 소비일지도 모르겠다.


김소라 요기요 마케터
#2030세상#명품소비#경험소비#오픈런#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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