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기찻길[동아광장/김금희]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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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찾아온 日 관광지에서의 불안
대전에서 접한 승객 배려 없던 역무원
일방적 지시 견디는 우리 마음 어떤가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일본의 유후인은 후쿠오카에서 기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온천 관광지로,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 곳이다. 모든 여행에 변수라는 것이 있지만 몇 해 전 유후인에서 나는 잊지 못할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도착한 날, 기차선로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태풍이 상륙했기 때문이다. 하룻밤만 자고 다시 후쿠오카로 나가야 했던 나는 나무가 뽑혀 나가는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를 들으며 불안에 떨었다. 예매한 기차는 운행을 중단했고 후쿠오카 시내에는 미리 예약해둔 숙소까지 있는데 일본어도 서툰 내가 당장 내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숲속 깊숙한 온천에서 쉬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온천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어찌 되었건 유후인역으로 나갔다. 역무원을 붙들고 대책을 찾아보는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는데 역 앞에 모여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기차를 타야 하는 현지인들인가 했더니 신기하게도 한국말이 들려왔고 내려서 다가가 보니 모두 한국 사람들이었다. 언제부터 모여들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합류했을 때는 이미 기차가 운행 중단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일종의 TF가 꾸려진 뒤였다. 당연히 그냥 관광객일 뿐인, 어제만 해도 나처럼 피곤한 일상을 떠나 온천욕을 하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을 누군가가 리더가 되어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역에 직접 확인한 결과, 기차 운행이 오늘내일 재개될 가능성은 없다. 여기서 나갈 방법은 택시밖에 없는데 수십만 원의 요금이 나오는 거리이니 4인으로 조를 짜서 이동해야 한다. 필요한 택시는 직접 우리가 부를 텐데 바가지를 쓰거나 목적지를 이탈하지 않게 일본어가 가능한 사람들이 나서서 미리 협의하고 안내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동의했고 택시에 함께 탈 사람들이 인원수와 목적지에 맞게 짝지어졌다. 대기열에서 기다리던 나는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여기서 처음 만난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택시기사와 목적지와 요금에 관해 협의했고, 또 당연히 여기서 처음 만난 한국인들과 함께 일행이 되어 택시를 탔다. 밤새 고민하고 불안에 떨던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은 순식간이었고 그건 바로 한국 사람들의 ‘일사불란함’ 덕분이었다.

유후인역에서의 이 기억을 다시 떠올린 건 얼마 전이었다. 부산에 일이 있어 다녀오는데 KTX가 대전역 근처에서 고장이 난 것이다. 자고 있던 나는 승무원이 쿵쿵 발소리를 내며 복도를 뛰어가는 소리에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행이 불가해 대전역으로 퇴행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거기서 후속 열차를 타게 된다는 고지였다. 대전역으로 가서 기다리면 기차가 오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내려보니 이미 맞은편에 우리가 타야 할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역무원들이 연신 손짓을 하며 기차를 타라고 안내했고 혹시 늦을까 사람들이 뛰다시피 해서 그 지시에 따랐다. 나 역시 급한 마음에 캐리어를 들고 뛰었는데, 타보니 기차는 이미 만석이었다. 그러니까 고장 난 기차의 승객을 태우기 위해 새로운 기차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뒤따라오던 기차를 멈춰 세워 거기에 더 실은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당황해하는 것도 잠시, 이내 기차는 차량 두 대분의 승객을 태우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좌석이 없는데 어디 앉느냐고 물은 사람은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단 한 명이었고 일단 어서 승차해 달라는 역무원의 말에 더는 항의하지 않고 차량에 올랐다. 이미 객실에는 사람들이 꽉 차게 서있어서 나는 출입구 앞에 겨우 자리를 잡아야 했다. 문제는 우리 일행 중에 디스크 환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고장 난 기차에서 내려 맞은편 기차로 옮겨 타라는 안내를 받았을 뿐, 그 기차에 내 좌석이 있는지 없는지, 만약 좌석이 없다면 혹시 그걸 보내고 다른 기차에 앉아 갈 수는 없는지 다른 어떤 선택지도 설명받지 못한 건 부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 순간에는 지시에 따르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내가 머뭇거리며 시간을 잡아먹다 보면 ‘서울 도착’이라는 목적지에 이 많은 사람들이 늦게 된다는 부담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과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손해 본다는 몸에 밴 패턴이 내게 있었던 걸까.

어떻든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덕분에 그날의 기차는 최소한의 연착만 한 채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만 어딘가 석연찮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날 객실에는 노인들도 있었고 내 일행처럼 몸이 아픈 사람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이동장에 강아지를 넣어 가던 사람도 있었는데 그 모두는 대전에서부터 서울까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남았다. 그러니까 그것을 견디는 우리, 한국 사람의 마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 말이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일본#유후인#온천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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