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심리학… 받아줄수록 심해진다[동아 시론/임명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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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폭언폭행 뒤 경비원 자살 비극
갑질은 인지편향과 피해의식이 원인
‘공감능력 부족’과 행동으로 이어져
주변인 향한 관심-연민 잃지 말아야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
20년 동안 병원에서 마음이 아픈 분들을 진료했다. 어쩌면 당연한 질문인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가요?” 이렇게 물으면서. 병원을 찾은 분들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분명히 마음이 아플 테니,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이야기를 잘 경청하자!’는 마음으로. 늘 직업상 습관적으로 다짐을 한다.

5년 전 병원에서 대학 심리학과로 직장을 옮긴 후에는 거의 진료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을 발견했다. 여전히 병원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내 눈 앞에 마음이 아픈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이분들은 분명히 마음이 아픈데, 전문가에게는 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의 대부분이 마음이 아픈 것은 아닐까? 나는 오늘 만나는 분이 어쩌면 아픈 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친절하게 경청하며 만나는 분들을 배려해야만 한다. 내가 장난처럼 돌을 던지거나, 단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몰아세우는 것이 어쩌면 그분을 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 수도 있다는 두려움 같은 것이 생겼다.

최근 한 아파트에서 입주민이 경비원에게 갑(甲)질을 했고, 그 결과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추측하건대 피해자인 경비원은 분명히 심리적으로 착하고 여리고 순한 성격이며, 다른 사람의 요청을 거절 못 하는 순응적인 분이었을 것이다.

학교폭력에 대처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에 상대가 나를 괴롭히는 듯한 행동을 하면, 아주 냉정하고 매몰차고 강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처음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가해자가 그 틈새를 보고 더욱더 괴롭힘의 강도가 세진다는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폭력과 갑질은 ‘내성(tolerance)’이라는 특성이 있어서 피해자가 받아주면 받아줄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더 견딜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파국에 이른 후에야 가해자이자 범죄자들은 모두 “피해자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몰랐다. 장난이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들은 항상 심각하고 비뚤어진 인지편향을 갖고 있었다.

갑질의 심리적 특성 몇 가지를 추론해본다. 경비원에게 갑질을 했던 그 가해자는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사회에서 아주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인데, 왜 주변 사람들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거지? 특히 아파트 경비원들의 행동을 보면 나를 존경해주지 않는 것 같아’ ‘나는 사회에서 끝없이 성공할 거야. 승진도 하고 커다란 권력도 갖게 될 거야’ ‘나는 사실 특별한 사람이고 약간 독특해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 청소원 아주머니들이 이런 나를 이해할 리가 없지’ ‘혹시 그들은 이렇게 훌륭한 나를 질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조금은 거만하게 행동해야만, 그들이 나를 질투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안 하게 될 거야.’ 한 가지 더. ‘세상은 정글이야. 나는 월급을 주고 경비원을 고용한 것과 다름없으니 무엇이든 나와 내 차(車)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들을 물건처럼 사용할 수도 있어. 그게 자본주의야. 그들이 작은 일에도 몹시 아플 수 있고 세상에 절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한 번도 공감해본 적이 없어.’

우리는 모두 조금씩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이 마음이 아프다는 가정을 하면, 모두에게 친절해야 하는 셈이다. 엄청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전문가도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를 기준으로 하면 좋을 것이다. 장애인, 아동, 노인, 여성, 노동자 등. 일종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지감수성이다. 어느 의대 시험에는 그 의대 건물을 청소하는 분의 이름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한다.

끝으로 생명의 줄을 ‘놓아버릴까? 조금만 더 버텨볼까?’ 고민했을 그 경비원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본다. 그 고뇌와 번민을 우리가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 지켜드리지 못한 미안함. 탈무드에 이런 글이 있다.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은 온 우주를 살리는 것이고, 천국의 맨 앞자리를 예약해 두는 것이다.’ 측은지심.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건강하시죠?”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께 배웠던 것처럼, 혹시 주변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시면 먼저 말을 건네고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
#심리학#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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