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현상 대처법[오늘과 내일/이승헌]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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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대사들과 DNA 다른 군 엘리트… 한미 서로 한발 물러서는 지혜 필요

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이쯤 되면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논쟁적인 미국대사라는 데 별 이견은 없어 보인다. 거의 하나의 현상이라 할 만하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 이야기다. 최근 주로 부정적인 이슈의 중심이 되고 있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기폭제가 됐다. 이혜훈 국회 정보위원장을 자기 집으로 불러 50억 달러 이야기를 스무 번가량 꺼냈다는 게 대표적이다. 얼마 전 의원들에겐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 좌파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시끄러웠다. 급기야 좌파 성향 단체들이 해리스 대사를 그려놓고 ‘참수’ 퍼포먼스까지 벌이려 했다.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지만 경찰의 사전 경고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을 뽑는 이벤트로 대체됐다. 전임 대사인 마크 리퍼트가 2015년 3월 서울 한복판에서 과도 테러를 당하자 회복을 기원하는 부채춤 퍼포먼스까지 벌어진 것과는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리퍼트를 비롯해 성 김, 캐슬린 스티븐스, 토머스 허버드, 스티븐 보즈워스 등 최근 주한 미 대사들을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전형적인 외교관이었다. 절제, 모호함이 업무 수칙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해리스는 아직 군인이다. 그것도 아주 잘나가던 군인. 해군 시절 몰던 대잠초계기 P-3 오라이언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그렇게 좋아할 수 없다. 그의 언어는 머뭇거림이 없다. 그와 대화를 나눠 보면 자신감을 넘어서는 묘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지난해까지 아시아계 최초의 미 태평양사령관(현재 인도태평양사령관)을 지냈다. 지구 면적의 52%에서 벌어지는 미군 작전을 관할했고, 거느린 병력은 37만5000여 명, 지휘하던 항공모함만 5척이었다.

DNA가 다르니 어쩔 수 없다는 건 아니다. 남의 나라에 왔으니 해리스도 변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해리스가 고압적으로 보이는 그 콧수염부터 밀었으면 좋겠다. 군인 시절 파르라니 면도한 얼굴에 해군 정복을 입고 미 워싱턴 청문회장에 나타나 토론하던 해리스는 지금보다는 더 호감 가는 인상이었고, 이성적 대화가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미국에선 수염 기르는 게 흔한 일이지만 한국 사회에선 아직 거부감이 있는 것도 해리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해리스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이 한미 동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감정과 무관하게 변치 않는 건 해리스가 트럼프를 대신해 한국에 와 있는 특명전권대사라는 사실이다. 리퍼트가 테러 당했을 때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필자는 미국인들이 보였던 날 선 반응이 아직도 생생하다. 동맹이라고 해서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의 최측근을 보냈더니 수도 한복판에서 칼을 맞을 때까지 한국은 뭐 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예비역 해군 제독(4성 장군)인 해리스의 집을 대학생들이 두 차례 무단 침입하고, 일부에선 참수를 거론하고 있다. 미국에서 참수는 beheading, 말 그대로 머리를 잘라낸다는 대단히 도발적인 행위로 인식된다. 미국이 몇 년 추적 끝에 지도자(알 바그다디)를 제거한 이슬람국가(IS)에 전쟁을 선포했던 계기는 2014년 미국인에 대한 참수 장면이 공개되면서다. 이렇게 민감할 때일수록 선을 넘지 않아야 우리도 상대방에게 바뀌라고 요구할 수 있다. 손님이니 일단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게 순서다. 얼마 전 “해리스 외가가 일본인”이라는 한 중진 의원의 말을 접한 해리스는 “난 미국인인데 왜 일본을 거론하느냐”며 심각한 표정으로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고 한다. 대사 한 명의 언행을 두고 한미가 싸워본들 누가 득을 보겠나. 김정은 웃을 일만 하나 더 늘어날 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해리 해리스#주한 미 대사#방위비 분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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