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크러시]〈16〉유리천장을 뚫고 나온 문장과 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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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헌의 아리따운 용모와 슬기로운 언어를 다시는 보고 들을 길이 없으니, 내가 사는 것이 슬픔이 될 뿐이구나.” ―야담집 ‘좌계부담(左溪談)’ 중에서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사랑 고백처럼 읽힌다. 그러나 이매헌(李梅軒)과 이 말을 한 화자, 조옥잠(趙玉簪)은 모두 여자다. 곧 이 글은 불우하게 일찍 죽은 친구 이매헌을 그리워하는 조옥잠의 한숨 섞인 혼잣말이다.

이매헌은 어렸을 적부터 문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펼칠 수 없었다. 조선 시대 대부분의 사대부가 여인들처럼, 비슷한 가문의 남자 한씨와 결혼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매헌은 남편의 내조나 집안을 번성시키는 데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부녀가 꼭 해야 하는 길쌈이나 바느질에 전혀 흥미를 갖지 않았고 글을 짓고 토론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때마침 중인 가문의 처녀 조옥잠이 이매헌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면서 두 사람은 신분의 고하를 떠나 영혼의 단짝이 된다. 시를 짓고 논평하는 취미가 같았고, 억압된 현실 속에서 능력을 감추고 살아야만 하는 우울한 감정이 거울을 비추듯 통하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시를 지어 화답하고 각종 경전과 역사에 대해서도 토론하였다. 그 경지는 “평범한 남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였다. 서로 담론하는 시간만큼은 여자로서의 규범 및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매헌이 유산한 후 죽게 되자, 조옥잠 역시 식음을 전폐하다가 병들어 죽고 만다.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주던 친구가 없어진 상실감이 너무도 컸고, 더 이상 자신의 정서를 펼칠 상대가 없다는 현실이 조옥잠에게 죽음보다 못한 고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해오라기 한 쌍은 어떤 마음으로 날아올랐다가 다시 앉는가/조각구름은 자취도 없이 흘러갔다가 돌아오는구나.”

이매헌이 죽기 전에 조옥잠에게 지어준 시이다. 조옥잠은 이 시에 “미래를 설계하는 의지가 없다”면서 이매헌이 일찍 죽을 것을 예상하고, 매우 걱정하였다. 이매헌이 벗어날 수 없는 답답한 현실에 대해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조옥잠이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이매헌은 수백 편의 원고를 남겼는데 모두 주옥같은 명문이었다. 그러나 시집에서 쉬쉬하였고, 친정에서도 깊이 감췄다. 당시 여자의 글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세상에 떳떳하게 내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조선 시대에 이매헌과 같이 문재를 마음껏 펼치지 못한 여류 문인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이 대표적 예다. 이매헌 역시 비슷한 처지였지만, 규방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시를 지음으로써 저항하였다. 여자가 시를 짓고, 문장을 논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현실 속에서 자아를 찾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펼친 것이다. 그 문재는 같은 처지에 있던 조옥잠과의 교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였다. 안타깝게 요절하였지만 이매헌이야말로 틀에 박힌 생활규범에서 벗어나기를 꿈꿨던 조선 시대 여성들의 삶과 마음을 절절하게 대변한다.
 
이후남 전주대 강사·국문학 박사
#좌계부담#이매헌#조옥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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