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김지영]무작정 줄 서지 말고 고개를 내밀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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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원스토어 eBook사업팀 매니저
김지영 원스토어 eBook사업팀 매니저
오늘 지하철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출구 계단을 향해 개찰구에서부터 긴 줄이 무려 한 줄로 이어져 있었던 것. 에스컬레이터도 아니고 폭이 꽤 넓은 계단이었는데, 사람들 질서의식이 대단하다 싶었다. 그들 중 몇몇은 앞을 쓱 보고는 갸우뚱해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며 줄을 지키는 듯했다. 순간 깨달았다. 이들을 줄 세운 것은 질서의식이 아닌 다수의 선택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 선택 위임이라는 것을.

낯선 광경은 아니다. 주변에서도 이런 선택 위임을 왕왕 마주한다. 언젠가 공연을 보고 화장실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었더니 남편이 반대쪽에도 있을 거라며 이끌었다. 아니나 다를까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기다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들의 선택을 믿어버린 것이다. 설마 이렇게 가까이에 다른 화장실이 있는데 줄을 서 있을 것이라고는, 이 많은 사람들이 이런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몇 해 전 남편과 속초 여행을 갔다. 유명하다는 새우튀김 골목에 갔는데 유독 한 집 앞에만 줄을 서 있었다. 검색해 보았지만 특별히 유명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나긴 기다림의 대열에 합류했다. 줄 서는 집에 대한 공연한 신뢰 탓이었다. 갓 튀긴 새우라면 있을 수밖에 없는 예상 가능한 맛있는 맛이었다. 그 골목 어느 집에서 먹었어도 비슷한 맛이었으리라.

돌아보니 이 또한 선택 위임이었다. 아마 처음에는 우연히 두어 명이 앞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우리처럼 공연한 믿음으로 뒤에 섰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이 그 뒤에 섰을 것이다. 그리하여 줄줄이 앞에 선 이에게 자신의 선택을 위임하는, 점주 입장에서는 뜻밖의 선순환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비단 이 가게뿐이 아니라 종전의 화장실, 지하철 계단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어쩌면 선택 위임의 메커니즘은 우리 생활에서 생각보다 넓은 영역을 관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선택 위임 중 제일은 아마 삶의 주요 미션으로 여겨지는 몇 가지―대입, 취업, 결혼, 출산―로의 줄 세우기가 아닐까. 나만 해도 주도적으로 해온 선택들이라 믿지만 착실히 그 길을 따라왔다. 고3 수험생활을 거쳐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했다. 5년 만난 애인과 결혼을 했고 어느덧 마지막 미션만을 남겨 놓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인사치레로 자녀 계획을 묻는다. 순서의 역행은 선택지에 없어 보인다.

이 미션까지 완수하면 나는 줄 서지 않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 영어유치원으로 시작해서 내 집 마련으로 끝나는 또 다른 대열이 손짓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우리는 과연 그 대열을 쉽게 못 본 체할 수 있을까. 다수의 타인들에게 선택을 위임하지 않고 오롯이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 길을 따라 걷는다 한들 그 끝에 있는 것이 우리가 원한 것일까.

오늘 광경을 보고 새삼 다짐한다. 앞에 서 있는 많은 이들을 보고 이 길이 맞다 믿어버리지 말자. 고개를 내밀어 보고, 이탈해 걷기를 겁내지 말자. 길의 끝에 있기를 희망하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김지영 원스토어 eBook사업팀 매니저
#줄#질서#선택 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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