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백인이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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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마이애미 돌핀스에서 뛰고 있는 케니 스틸스가 시범경기에서 국가 연주 도중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CBS뉴스 영상 캡처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마이애미 돌핀스에서 뛰고 있는 케니 스틸스가 시범경기에서 국가 연주 도중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CBS뉴스 영상 캡처
한기재 국제부 기자
한기재 국제부 기자
지난달 중순 휴가차 여행을 떠났던 미국 뉴욕에서 봉변을 당했다. 기념품을 사기 위해 들어간 상점에서 위조지폐범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휴가 마지막 날 밤의 아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뉴욕 스포츠팀의 상품을 모아 파는 가게에 들렀다. 환전한 지폐를 다 써야겠다는 생각에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의 티셔츠를 두 장 집어 들고 카드 대신 현금을 냈다. 상점 구경을 5분 정도 더 한 뒤 거리로 나섰다. 200m 정도 걸었을까.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건장한 흑인 아저씨였다. “아까 티셔츠 사고 갔죠? 뭔가 문제가 생겼는데….”

자초지종은 이랬다. 내 바로 다음 순서로 결제를 한 사람이 실제 위조지폐범이었고, 현장에서 적발되자 무슨 심보였는지 “내 앞에 그 ‘중국인’도 한패다”라고 진술한 것이다. 경찰의 일처리는 당혹스러웠다. 신분증을 보여주며 한국인 여행객임을 강조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경찰서에서 정식조사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나를 도와준 사람은 나를 불러 세워 놀라게 만들었던 그 흑인 아저씨 ‘마이크’였다. 상점 직원인 그는 내가 내민 한국인 신분증을 보고는 앞장서서 나의 결백을 주장해줬다. 1시간가량의 실랑이 끝에 현지에 사는 친구의 주소를 남기는 선에서 자유의 몸이 됐다.

당시에는 당황과 분노가 겹쳐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한 달 정도 지나니 해프닝으로 기억에 남게 됐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이 여전히 무거운 것은 마이크가 내게 남긴 한마디 때문이다.

“백인이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 마이크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피부색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했던 수많은 순간을 떠올리며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내 변호에 나서줬던 것은 아닐까.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에 관심이 쏠리게 된 건 그 해프닝 이후다. 경기 시작 전 국가 연주 시간에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선수들이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가 이번 시즌에도 예고돼 있기 때문이다.

전체 NFL 선수의 70%를 차지하는 흑인 선수들을 필두로 한 이들은 흑인에게 유난히 거친 일부 경찰의 공무집행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2016년 이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같은 해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선 백인 경찰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라고 항변하던 흑인 남성을 때려눕히고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무리한 진압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이 공개되면서 미국 사회는 분노했다. 팀 전체가 팔짱을 끼며 ‘인간 띠’를 만들고 백인 선수까지 ‘무릎 꿇기’에 동참하는 등 경기장에서의 인종차별 반대 퍼포먼스는 일상화됐다.

이 퍼포먼스는 비애국적이라는 비판도 낳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무릎 꿇기’를 하는 선수들을 ‘개××’라고 부르면서 논란을 확대시켰다. 부담을 느낀 NFL 사무국은 올해부터 국가 연주 시간에 기립을 의무화하겠다고 5월 발표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비난도 이들의 의지를 꺾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선수들이 사무국의 일방적인 결정에 반발하면서 정책 시행이 보류된 것이다. 이달 시작된 시범경기에서도 선수들은 침묵의 시위를 이어갔다. 이제 관심은 다음 달 6일 정규시즌 개막경기 국가 연주 시간에 쏠려 있다.

‘비애국적’이라는 비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 애국심이 없어서 그런 퍼포먼스를 벌이는 걸까. 2016년 기준으로 흑인의 인구 10만 명당 수감자 수는 1608명, 백인은 274명이다. 전체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흑인이 감옥 인구의 33%를 차지하는 데 사회구조적 원인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1955년 백인에게 린치당하고 살해된 흑인 남성을 기리는 미시시피주의 추념 표지엔 아직도 매년 100개 이상의 총알이 박힌다. 백인우월주의자 등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노예제도를 결사 옹호한 ‘남부연합’을 기리는 기념물 800여 개는 여전히 박물관이 아닌 미 전역 공공장소의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번엔 시티필드(메츠 홈구장)에서 웃으며 인사 나눠요.”

마이크는 자기도 메츠 팬이라며 이렇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뉴욕 퀸스 출신이라며 친근감을 보이기도 했다. 언제 다시 마이크를 볼 수 있을까.

흑인인 그가 “백인이었다면…”을 되뇔 일이 사라질 가능성보다 그를 시티필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될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한기재 국제부 기자 record@donga.com
#글로벌 이슈#인종차별#백인우월주의#nf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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