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자유한국당의 CVID, 오히려 기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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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트럼프가 싱가포르에서 못 해낸 CVID를 홍준표와 자유한국당이 해냈다.”

한국당이 6·13지방선거에서 궤멸되자 정치권에선 이런 말까지 돌고 있다. 한국당이 비핵화를 이룬 것도 아니고, 처음엔 기자도 무슨 소린가 했다. 알고 보니 이 CVID는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 중 마지막을 Defeat로 바꾼 말의 약자란다. 검증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완전한 패배라는 거다.

한국당은 모욕감을 느끼겠지만 CVID가 맞다. 시도지사는 14 대 2(무소속 1)로 더불어민주당에 완패해 ‘자유TK당’으로 전락했다. 국회의원 재·보선에선 11 대 1로 무너졌다. 서울 구청장은 25개 중 강남구를 포함해 24개를 민주당에 내줬다. 민주당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 측은 선거 전 기자에게 “다 이기면 역풍 분다. 강남, 서초구청장은 한국당이 가져가도 좋다”고 했을 정도였다.

CVID 된 한국당은 ‘멘붕’을 넘어 초유의 상황을 맞고 있다. 누구도 해법은 모른다. 서울의 한 중진 의원은 “선거 다음 날 집 근처 지하철역으로 가서 사람들 붙잡고 ‘죄송하다’고 인사만 하고 왔다. 그거라도 안 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보수 세력이 오랜만에 흰 도화지 위에 놓였다는 것이다. 제대로 민심의 폭격을 받아 흙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은 ‘그라운드 제로’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한국당과 그 전신인 새누리당, 한나라당은 최근 십수 년 동안 궤멸적 패배를 당했어야 할 시점에 이를 용케 피해 갔다. 당시엔 좋았겠지만 결과적으로 환부만 더 키운 셈이 됐다.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후폭풍으로 떠내려갈 듯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단독 드리블로 살아남았다. 2012년 총선에서도 당시 민주당이 종북 세력과 손을 잡는 자살골 덕에 예상 밖으로 과반 의석을 넘겼다. 지난해 탄핵 후 대선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41.1%를 얻었지만 홍준표 한국당 후보가 24%,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21.4%를 얻어 완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미리 한 번쯤 무너져 새살이 돋아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당으로선 어찌 보면 더 늦기 전에 갱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었다. 살아남으려 뭐든 할 것이다. 하지만 웬만한 충격적 변화가 아니면 사람들은 지금처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당 안팎에선 ‘제2의 천막당사’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지난달 ‘드루킹 특검’을 관철하겠다며 한국당이 국회 앞에 차린 천막 농성장을 보면 솔직히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 투쟁하겠다며 차린 천막은 야외 글램핑장에서 볼 법한 바비큐 파티용 텐트였다. 여권 관계자는 당시 “무슨 체육대회 본부석 같았다”며 비웃었다.

일각에선 “홍준표가 대표에서 물러났으니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홍준표의 막말 하나도 못 말린 사람들이 선거를 지휘했다고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으로 보는 사람 역시 별로 없다.

한국당으로선 처음 겪는 ‘고난의 행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 지방선거보다 더 중요한 2020년 총선에서 대패해 그야말로 보수의 씨가 마르는 것보단 낫다. 이번 패배는 국민들이 미리 준 예방주사 같은 거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CVID를 넘어 영원히 집권당 근처에도 못 가는 ‘P(Permanent)VID’가 될 수도 있다. 한쪽으로만 기운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자유한국당#cvid#6·13 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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