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원수]‘총리선출’ 권한문제 풀 수 있는 묘수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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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정치부 차장
정원수 정치부 차장
“나더러 벼슬을 사라는 말이냐? 나는 너를 이런 식으로 교육하지 않았다.”

6·25전쟁 휴전협정 협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총리 후보로 이윤영을 지명했다. 비서가 “국회 인준 동의를 얻으려면 돈을 써야 한다”며 정치자금 1억 원을 갖고 오자 이윤영은 타일러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국회의원 2명이 찾아와선 “2억 원을 주겠다. 그것을 국회에 뿌리면 인준은 문제없다. 그 대신 내무부 장관 자리를 달라”고 제안했다. 전쟁 직전 1억 원은 현재 가치로 21억 원 정도다. 전쟁 중이어서 화폐 가치가 10분의 1 이하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큰돈이었다.

비서가 이렇게 나온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이윤영 정치 인생에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총리 도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초대 총리가 될 수 있었던 1948년 7월에도, 2대 총리에 도전했던 1950년 4월에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 동의가 그만큼 절박했다. 결국 그는 총리 임명장 대신 헌정 사상 세 번째 총리서리(署理)에 만족해야 했다. 백사(白史) 이윤영 선생이 생전에 회고록에서 공개한 일화다.

갑작스러운 첫 후보 지명과 불의의 낙마, 재도전 뒤 4표 차 부결, 세 번째 도전 끝 가부동수 좌절…. 출발부터 대통령과 국회의 정면충돌로 이어졌던 총리 제도의 허점이 그대로 드러난 극단적인 사례다. 공교롭게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각 정당 간에 엇갈리는 총리 선출 개선 방안이다. 이윤영도 책에서 “역사적 경험이 주는 교훈이 적지 않다”고 한 막전 막후를 되짚어서 개헌안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코드를 찾아봤다. 잘만 운용한다면 한국만의 독특한 총리 제도가 계륵이 아니라 의원내각제 요소로 대통령제를 보완할 수 있는 묘수가 될 수도 있다.

첫째, 총리는 출발부터 국회의원 또는 정치인 중에서 뽑는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대통령 스스로 제헌국회에서 인사 배경을 이같이 설명했고, 당시 정당 추천 인사도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이낙연 총리와 서리까지 포함해 역대 총리 55명 중 정치인은 10명을 넘지 않는다. 처음 설계한 것과 달리 역대 대통령은 총리를 국회나 정치인 몫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인 총리가 행정부와 입법부의 가교 역할을 상대적으로 잘해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원점으로 돌아가 앞으로 총리는 국회의원이나 국회의원 출신 중에서 지명하도록 하면 어떨까. 법적으로도 총리를 겸직하는 데 문제가 없다. 더구나 국회의원 출신은 인사청문회에서 한 번도 낙마한 적이 없지 않나.

둘째, 세력 없는 정치인을 위한 상징적인 자리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석에서 총리를 미국의 부통령과 다른, ‘별 의미가 없는 자리’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2대 총리인 장면은 “모든 일에서 내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간다”고 말했다가 국무회의 때 대통령에게 무시당했고 결국 단명했다고 이윤영은 기억했다. 그는 국회에 총리 후보자가 공개되는 당일 오전 2시 지명을 통보받았다. 행정부를 둘로 쪼갤 게 아니라면 대통령과 충돌할 총리를 굳이 둘 필요가 있을까.

마지막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부분은 대통령 바로 아래 2인자 인사권을 세 번씩이나 거절하는 의회의 견제 방법이다. 국회에 대한 낮은 신뢰도, 법안과 예산 심사 과정의 불투명성이 그대로인데 총리의 권한을 늘리고, 국회가 총리를 선출하는 것까지 국민들이 동의할까. 그 전에 총리 후보 복수추천제, 권력기관장 및 장관의 의회 인준부터 우선 시행해 보자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내고, 정당도 창당했던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제 도입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입법부의 폭정이야말로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위험 요소”라고 한 적이 있다.
 
정원수 정치부 차장 needjung@donga.com
#개헌#국무총리#국회 신뢰도#의원내각제#입법부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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