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28〉가해자의 상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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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있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사고는 지금까지 있었던 해양사고 중에서 가장 큰 사고였다. 9000명이 넘게 죽었고 그중에 절반 이상이 아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영화로 만들어진 1912년의 타이타닉호 사고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보다 희생자가 대여섯 배 많았던 그 사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히틀러의 나라 독일에서 전쟁 중에 일어난 사고인 데다 독일인들 스스로가 그 기억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가해자였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들의 첫 번째 과제는 반성과 참회와 속죄였다. 그러다 보니 소련군의 어뢰에 맞아 배가 순식간에 침몰하면서 생긴 자신들의 비극적 사고를 입에 올릴 여유가 없었다. 교과서에서도, 역사서에서도, 이 사건은 금기였다. 가해자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억은 억압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힘으로 누르면 당분간은 눌리지만, 그 힘이 느슨해지면 언젠가는 밖으로 나온다. 그것도 왜곡되어 나온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억압된 것이 극우주의자들의 입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물었다. 어째서 우리가 남의 눈치만 살피면서, 우리 아이들의 죽음은 생각하지 않느냐. 많은 것들을 왜곡하고 극단으로 몰고 가는 그들이지만, 적어도 그 논리만은 틀리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게걸음으로’라는 소설에서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1월의 차가운 물에 빠져 죽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극우주의자들이 독점하여 왜곡하게 방치하지 말고, 그들을 제대로 애도하자고 했다. 이제는 국가의 책임과 개인의 상처를 별개의 것으로 볼 때가 되었다고 했다.


독일이 과거에 발목이 잡혀 운신의 폭이 좁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라스는 정말이지 두려움을 모르는 작가였다. 2012년에 발표한 ‘해야 할 말’이라는 시에서 “서구의 위선에 질렸다”며 “이스라엘의 핵이/이미 취약해져 있는 우리의 평화를/위협하고 있다”고 거침없이 토로했듯이, 그는 너무 늦기 전에 구스틀로프호의 희생자들을 애도해야 한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맞는 말이다. 아이들만 해도 5000명 이상이 죽었는데, 가해자 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상처를 갈라서는 안 될 일이다. 어느 쪽의 것이든 상처는 아픈 것이고 위로와 다독임의 대상일 따름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사고#해양사고#프로이트#억압된 것의 귀환#귄터 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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