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최지훈]아버지의 환갑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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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아버지와 대립이 고조되던 때가 있었다. 대학을 마치고 유학까지 다녀온 후였으니 사춘기의 치기도 아니었다. 사소한 시각차가 뜬금없이 자라나 큰 소리가 나곤 했다. 내가 알던 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대화는 끊기기 일쑤였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전투는 주로 식탁에서 이루어졌다. 피 터지는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면 진이 빠져 있곤 했다. 얹히는 듯한 배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이처럼 다른 이유가 뭘까.

컴퓨터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서울 용산을 자주 찾았다. 용산이 전자제품의 메카로 명성이 높던 시절이다. 초등학생이던 나에게 전자상가는 꿈의 공간이었다. 신기한 기계로 둘러싸인 창문 없는 공간은 다른 세계였다. 일 보시는 아버지 곁에서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나와서 보면 날은 저물어 있었다. 종종 손에 게임팩이 들려 있는 날이면 아버지가 왕으로 보였다. 돌아오는 차 안의 냄새가 아직도 생각난다. 뒷좌석은 온전히 나의 세상이었다. 가로로 누울 수도 있었다. 튼튼한 차 안에서 놀다 졸다 하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다. 아버지의 차는 또 하나의 안식처였다. 그것은 나를 어디든 데려다 주는 마법이기도 했다. 학교 성적이 오르면 상을 주시고 떨어지면 꾸지람을 들었다. 간단했다. 공부만 하면 됐다. 놀기와 공부하기. 그 이외에 신경 쓸 일은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은 보호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농촌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 아버지는 공부와 노는 것 외에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집안 일손을 도와야 했고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주말이면 아빠와 손잡고 용산에 놀러가는 말랑한 삶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나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후퇴했던 사회는 제자리로 가기 위한 몸부림에 요동쳤다. 안락함보다는 역동성이 우선이었다.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가정을 꾸린 후엔 책임감이 더해졌다.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면 다리에 힘을 풀 겨를이 없었다. 급변하는 사회에 뒤처지지 않는 것도 관건이었다. 속도가 느려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생겼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내 것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한 가족으로 살아온 지 30년이 넘었다. 별 탈 없이 지내온 우리 가족이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생각해 본 적 없다. 언제나 거기에 계신 분들이었다. 아버지를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서른이 넘으니 나도 내 나름의 철학이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의견이 정립되고 굳어졌다. 아버지의 철학과 맞대어 비교할 수 있게 됐고 마찰이 생겼다. 아버지를 깊이 알 수 있었다. 잦은 충돌은 서로를 조금씩 깎아냈고 언제인지 모르게 부딪힘이 사라졌다. 마치 잘 연마된 금속 표면처럼 매끈하게 깎여 서로를 소리 없이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께서 환갑을 맞았다. 가게 셔터를 내렸다. 음식을 약간 만들어 상에 올리고 케이크에 초를 밝혔다. 해드리지 못한 게 너무 많았다. 넓은 홀과 산해진미도 없었고 재롱떠는 손자 손녀도 없었다. 일찍이 상상하던 잔치와는 많이 달랐다. 미니멀리즘이 대세라며 헛헛이 웃었다. 요란한 음악과 넘치는 음식은 없었다. 오로지 아버지께 집중하는 우리만 있었다. 아버지의 새로운 60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당신을 깊이 이해하는 아들과 함께였다.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셨다. 모자란 게 많아 죄송했던 마음이 그 미소에 사그라들었다. 존재만으로도 나를 따뜻하게 하는 분이셨구나. 가만히 앉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당신의 모습을 눈과 귀에 빼곡히 채워 넣었다.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아버지의 철학#아버지의 환갑#아버지라는 존재만으로도 나를 따뜻하게 하는 분이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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