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신세돈]개혁이 늘 실패하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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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강과 서민보호 위한 송나라 왕안석의 개혁신법
조정이 유통에 개입하고 저금리 단기대부업도 나서
내용과 의도는 좋았으나 ‘실시 과정’에서 변질돼 실패… 관료 정신재무장이 우선돼야

신세돈 객원논설위원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
신세돈 객원논설위원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
1069년 스물한 살 송나라 신종 조욱은 허약해진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슴에 품고서 이미 능력이 입증된 왕안석(1021∼1086)을 등용했다. “낡은 법을 없애고 새로운 법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여 신종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왕안석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라는 개혁기구를 창설해 개혁신법을 주도했다. 그의 개혁은 한편으로는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서민생활을 지켜내기 위해(民生) 국가가 적극 개입하자는 것이었다.

왕안석 개혁신법의 내용은 이렇다. 먼저 균수법(均輸法)은 국가에 필요한 공물(특산물세금)의 계획을 미리 세운 다음 불필요한 공물은 시장에서 매각하여 그 돈으로 물자를 시장에서 매입하자는 제도였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유통 중개업에 적극 참여하여 국가재정을 확충하면서 동시에 납세자의 편익을 증진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 조정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기득권의 반발도 반발이지만 균수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유통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부당한 개인 이익 편취, 부패 부조리 혹은 횡포가 더욱 결정적인 이유였다.

청묘법(靑苗法)은 춘궁기에 국가가 저리로 농민에게 대출해 주는 제도였다. 당시 민간 대부업자의 대부이자는 5, 6할이었으나 국가는 2할만 징수하였다. 국가가 저금리 단기 대부업에 뛰어든 것이다. 반대가 격렬했다. 고리 대부업자, 즉 지주의 이해가 침해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사마광, 구양수, 정호, 정이 및 소식 등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마저 고리 대부업자를 두둔하기 위해 청묘법에 반대했다고 믿기는 정말로 어렵다.

문제의 핵심은 역시 청묘법을 ‘실시하는 과정’에 있었다. 당시 왕안석은 청묘법의 실적(대출 및 이자수입 규모)으로 지방 관료를 평가했다. 실적에 쫓기는 관료들은 무리하게 강제 대출을 자행했고, 무분별하게 빌려 쓴 농민들은 예상치 못한 흉년으로 상환하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실적에 쫓기는 관리들은 가혹하게 징수했고 대다수 농민의 생활은 청묘법 이후 더욱 열악해진 것이다.

모역법(募役法)도 그렇다. 당시 농민들은 재산 정도에 여러 가지 국가의 직역(職役)을 담당해야만 했다. 직역이란 정부의 여러 잡무를 대신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직역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국가창고를 관리하거나 혹은 세금으로 징수한 곡물을 운송하는 업무였다.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결손액을 스스로 변상해야 했다.

정부는 배상 능력이 있는 지주계층에 이런 직역을 배정했다. 그러나 국고관리 혹은 운송을 잘못하여 파산하는 지주나 농민이 속출하면서 도망가거나 혹은 자살하는 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정부가 돈을 받고 직역을 면제해주는 대신에 그 돈으로 직역을 맡을 전문가를 모집하는 제도가 모역법이다. 지주에게도 좋고 일을 얻은 자에게도 좋고 국가도 좋은 일거삼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실시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소요되는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거두었고 나아가 직역을 담당하지 않던 극빈 농민에게도 면역전을 부과하면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맞춤형으로 농민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모역법 또한 ‘실시하는 과정’에서 변질되어 농민에게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다.

시역법(市易法)도 그렇다. 당시 중국에도 후려치기 바가지 등 상인들의 갑질이 있었다. 왕안석은 호상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국가자본을 들여서 시역무(市易務)란 기구를 개설하였다. 팔리지 않는 물건(滯貨)을 대량으로 구매한 뒤 저가로 방매하자는 것이었다. 시역무는 정부에서 설립한 도매기관, 즉 관영 무역회사인 셈이었다. 그러나 시역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관료들은 독점 이익을 위협받은 호상들에게 적극적으로 매수당했다. 구법당은 물론 후궁까지도 매수당하여 황제를 움직였다. 결국 왕안석은 실각했고 개혁신법은 폐기되었다.

왕안석 개혁신법의 내용은 거의 모두가 매우 훌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시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과 반작용 때문이었다. 과도한 집행으로 인한 마찰과 담당 관료들의 부정부패라는 부작용, 그리고 피해를 입은 계층들의 적극적인 매수 혹은 정권 결탁과 같은 반작용이 개혁신법을 실패하게 만든 것이다.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관료들의 일관된 정신 재무장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교훈을 깨우쳐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신세돈 객원논설위원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
#모역법#시역법#왕안석 개혁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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