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구호의 ‘패션 쿠데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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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지난달 초. 휴일에 세차장에 갔다가 역시 세차하러 온 그를 만났다.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 씨(53). 그는 1997년 만든 여성복 브랜드 ‘구호(KUHO)’를 성공시켜 10년간 제일모직 임원으로 일했고, 파리와 뉴욕에서 수차례 패션쇼를 열었다. 영화 ‘스캔들’과 ‘정사’의 미술감독을 맡았으며, 국립무용단 창작무용도 연출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5월 20일 서울패션위크 초대 총감독이 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했다. 2000년 서울컬렉션이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서울패션위크(서울시 주최, 서울디자인재단 주관)가 출범 15주년을 맞아 신설한 자리였다.

축하 인사를 건네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뜯어고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서울시의원이 초등학생 딸과 쇼에 와서 ‘내가 왜 줄을 서서 입장해야 하느냐’고 따지지를 않나, 사방에서 티켓을 공짜로 달라고 하지를 않나.”

그로부터 한 달 반 동안 국내 패션계엔 ‘쿠데타’가 진행 중이다. 지난달 19일 서울디자인재단 홈페이지에는 올해 10월에 있을 서울패션위크 참가 공고가 떴다. 이제까지는 평가에서 참가업체의 매출 실적이 70%였고 글로벌 경쟁력과 창의성은 30%였다. 그런데 이번에 창의성 요소를 60%로 높였다. ‘혁명적’이다. 연줄이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10명의 심사단에는 해외 전문가 4명도 포함시켰다.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디자인의 창의성과 시장성만으로 평가한다. ‘정구호식 쿠데타’다.

하루아침에 ‘게임의 룰’을 바꾸자 지명도 높은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한국디자이너연합회는 반발했다. 특히 이상봉 회장은 “연합회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처사”라며 서울패션위크 불참을 선언했다.

정구호 씨는 지난주 신문사로 나를 찾아왔다. “정작 문제는 디자이너였어요. 서울패션위크를 패션 비즈니스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더이상 나눠 먹기 식 쇼는 안 됩니다.”

60명 모집에 104명이 지원해 오늘까지 심사가 이뤄진다. 발표는 23일이다.

정 씨는 미국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작은 분식집을 하다가 1990년대 한국에 와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전적 의미의 디자이너는 아닐 수도 있다. 나는 한때 ‘정구호는 과대평가된 것 아닐까’ 의심했지만 이제는 그를 ‘한국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아모레퍼시픽 설화문화전의 뼈대를 만들었고, 전국의 맛을 찾아내 CJ비비고 메뉴로도 발전시켰다. 패션이 전방위 문화란 걸 보여줬다.

나는 지금껏 디자이너연합회 소속 디자이너 ‘선생님’들의 옷을 즐겨 입어왔다. 이상봉, 신장경, 홍은주…. 한 땀 한 땀 정성스러운 ‘코리안 럭셔리’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구호’의 편을 들고 싶다. 패션이야말로 개개인의 창의력으로 승부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 아닌가. 서울시가 연간 27억 원을 지원하는 서울패션위크에서 원로와 신진이 글로벌산업을 고민하며 경쟁해야 하지 않겠나. 가수의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로 평가하는 어느 방송 프로그램처럼 지명도는 빼고 창의력으로 승부하는 디자인 경연을.

다시 지난달 세차장. 정 씨는 내게 말했다. “전 갑옷을 입었어요. 총알 맞을 준비가 돼 있어요.” 처음부터 쿠데타를 결심했던 모양이다.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쿠데타에는 ‘정교한 기술’이 있더라고. 명분을 갖추면 혁명도 될 수 있다고. 모두 당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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