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오늘도 난 ‘호구’를 꿈꾼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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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 전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이영민 전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두 살배기 아들을 둔 친구와 술을 마셨다. 술 몇 잔에 친구의 푸념이 시작됐다.

“너 아까 나한테 직장생활은 할 만하냐고 물었지? 할 만해서가 아니라, 할 게 없어서 하는 거지 뭐. 결혼하고 애 낳으니까, 10년 일했어도 통장에 남는 게 없다. 죽어라 일해도 티는 안 나고 몸만 축나고. 이렇게 단맛만 쪽쪽 빨리다가 팽(烹)당하는 거 아니겠어?”

내가 물었다. “그럼 직장생활이 아니라면 뭘 하고 싶은데?” 대화는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안주는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연거푸 술만 마셔댔다.

집에 돌아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무심코 켠 TV에서 ‘호구의 사랑’이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었다. 일이든 사랑이든 꼬박꼬박 제 몫을 챙기지 못하고 남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봐도 될 텐데 드라마는 그를 찌질하다는 뉘앙스로 그렸다. 약삭빠르게 제 몫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을 ‘호구’라 보는 것 같았다.

과연 호구를 못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작년에 ‘빅이슈’에 연재하기 위해 꿈을 좇는 청년들을 찾아다녔다. 양계장을 운영하는 20대 청년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닭장이 그의 집’이라 해도 될 정도로 건실하게 일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경사로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는’ 낡은 자동차를 함께 타고 가던 중 “양계를 전공한 대학 동기 중에는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닐 정도로 성공한 이들도 많다”고 했다.

닭을 키우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양계장과 달리 풀과 볏짚 등으로 직접 만든 사료를 쓰고 화학약품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닭을 넓은 우리 안에 풀어서 키우며 성장과 산란을 촉진하는 인공조명도 거부했다. 당연히 수익률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한 것이다.

사정은 다른 청년들도 비슷했다. 국내 유수의 발레단 솔리스트라는 안정적인 지위 대신 무명 사진가의 길을 택한 청년, 안락한 외국계 증권사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거리에서 인력거를 끄는 청년, 대기업 상사를 나와 수제 잼을 만들어 도시 내 장터에서 파는 청년 등. 모두 눈앞에 차려진 제 몫을 챙기지 않은 ‘호구’였다.

이들은 왜 호구가 됐을까. ‘양계 청년’의 답은 이랬다.

“어려서부터 닭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 시골로 이사 갔는데, 뒤뜰에 닭 수백 마리를 키울 정도로 좋아했죠. 처음에는 자연순환이나 유기농법 같은 걸 생각지 않았는데 대학 때 실습을 나갔다가 달라졌어요. 닭에게 먹이는 사료와 약을 배합하는 일을 했는데 실습 몇 달 만에 제 몸에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닭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거두절미하면 ‘너무 좋아하는 것(닭)이 있는 바람에 호구가 됐다’는 말이다. 다른 청년들도 저마다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그걸 위해서 안정적인 지위나 월급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속 주인공도 짝사랑이 깊은 나머지 ‘아낌없이’ 손해를 본 게 아닌가.

부러운 일이다. 나는 2년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급여도 괜찮았고 그곳에 다닌다는 걸 부러워하는 이도 있던 직장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일을 정말 좋아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청춘을 투자하는 것에 대해 손익을 따졌다. 계산의 결과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나서자’였고, 이후 2년째 탐색만 하고 있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주변에 “직장생활 못해먹겠다”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하지만 “그만두면 뭘 할 건데?”라는 물음에 뾰족한 답이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저 한참 넋두리를 늘어놓은 뒤 “처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고 갈무리할 뿐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호구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지만 하지 못한 일을 하는 이들이 된다. 이 때문에 호구는 ‘못난 놈’이 아니라 ‘난 놈’이다. 물론 호구를 이용해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사람들은 ‘못된’ 것이고. 그래서 오늘도 난 호구를 꿈꾼다.

이영민 전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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