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박형준]유쾌한 벌금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40여 년을 살며 처음 법정에 섰다. 그것도 일본에서 말이다.

지난해 9월 27일 나가노(長野) 현 온타케(御嶽) 산에서 화산이 분화했을 때 도쿄(東京)에서 차를 몰고 급하게 피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때 그만 무인 속도측정기에 찍히고 말았다. 제한속도가 시속 50km인 국도를 95km로 달린 것이다.

과속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던 지난달 중순, 법정에 출두하라는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벌금 최고액이 10만 엔(약 93만 원)이니 그 금액도 같이 준비하라’고 적혀 있었다. 국도의 경우 제한속도를 시속 30km 미만으로 초과하면 미리 정해진 벌금을, 시속 30km 이상 초과하면 간이재판 후 결정된 벌금을 내야 한다.

‘과속으로 약 100만 원의 벌금을 내야 하다니….’ 기자는 화산 분화 당시 동아일보 신문을 찾았다. 온타케 산 분화 르포 기사엔 기자의 얼굴 사진까지 들어가 있었다. 재판관에게 신문을 들고 사정을 설명하면 분명 정상참작이 될 것으로 믿었다.

도쿄에 첫눈이 내린 지난달 30일 기자는 법정에서 약식재판을 받았다. 조사원에게 신문을 건네며 “일본의 대재앙을 한국 독자에게 한시라도 빨리 전달하기 위해 속도를 냈다. 그 증거이니 재판관에게 꼭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조사원이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전달은 하겠지만 벌금액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법의 형평성’을 이야기했다. 속도 위반자 중에는 생명이 위독한 아버지를 태우고 병원을 향해 달린 사람, 산통이 오는 아내를 태우고 병원으로 직행한 사람 등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는 그런 사연을 하나하나 참작하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기자는 “그러면 벌금액 차이는 어디서 나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랬더니 ‘위험도’가 기준이라고 답했다. 일반적으로 위반 속도가 높을수록 벌금도 많아진다. 승용차보다 더 많은 사람이 탑승하는 승합차에 더 무거운 벌금이 나오고, 고속도로보다 일반 도로의 속도위반이 더 벌금이 많다. 일반 도로에선 행인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약 1시간 뒤 약식재판 결과가 나왔다. 벌금은 8만 엔(약 74만4000원). 복도에서 다시 만난 조사원은 미안한 듯 말했다. “벌금이 너무 많지요? 벌금이 무겁지 않으면 제대로 머릿속에 각인이 안 됩니다. 이해해 주세요.”

70만 원이 넘는 벌금을 냈으니 속이 쓰릴 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상쾌했다. 곱씹어 보면 조사원의 말이 어느 것 하나 틀린 게 없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국 기준으로 보자면 일본은 인정(人情)이 너무 없다. 옷을 살 때 에누리를 기대하기 힘들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카레를 조금 더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 은행 마감시간에 1분이라도 늦으면 업무를 받아주지 않는다. 살기에 참 각박한 사회다.

바꿔 말하면 일본은 정해진 규율을 철저히 지킨다. 시골 여관이라도 매일 매뉴얼에 따라 청소를 하기 때문에 항상 깨끗하다.

일본인들 눈에는 오히려 융통성이 너무 많은 한국이 이상하게 비친다. 세월호 참사, 대한항공의 ‘땅콩 리턴’ 등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연말정산 소급입법도 일본에선 일어나기 어렵다. 특정 정책이 국회에서 논의될 때 TV와 신문에 연일 보도되고, 민감한 정책은 수년에 걸쳐 세세한 부분까지 다뤄진다. 국회가 최종 결정하는 단계에선 국민 여론도 대체로 수렴돼 있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믿음과 한번 정해놓은 법을 최대한 지키는 국민성. 믿을 만한 제품의 또 다른 말인 ‘메이드 인 저팬’을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벌금#규율#국민성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