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선미]아버지의 대한항공 코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1. 물건에 생명이 있다고 믿게 됐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점’에 다녀와서다. 디앤디는 일본 디자이너인 나가오카 겐메이 씨가 2000년 도쿄에서 시작한 ‘디자인+재활용 점포’로, 1년 전 생긴 서울점은 최초의 해외 점포다.

이곳은 물건의 장수(長壽)를 응원한다. 전국을 다니며 오래 아낄 만한 물건을 찾아와 판다. 숫자 스티커로 ‘물건의 나이’도 표시한다. 충북 삼화금속의 무쇠 가마솥은 21세, 전남의 남상보 옹(82)이 만드는 대나무 바구니는 62세이다.

물건에 새 생명도 불어넣는다. 올해 44세인 경남 송월타월의 때타월은 디앤디와 손잡고 순백의 때타월(1500원)로 거듭났다. 지인들에게 선물했더니 “이렇게 예쁜 때타월은 처음 본다”는 반응이었다.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는 느낌 때문일까. 300원짜리 도루코 칼도 디앤디에서는 디자인 제품으로 보인다. 소비사회에서 물건의 수명은 어떤 의미일지 나가오카 씨에게 질문해봤다. “올바른 물건을 올바른 가격에 사고 싶다는 의식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올바른 물건만이 긴 수명을 누릴 수 있고,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2. ‘장수’는 패션업계에서도 주요 화두다. 새로운 소비를 할 여력도, 소비에 따른 한계효용도 쪼그라들어 옛날 옷을 입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돈 안 들이고 감각만으로 승부할 수 있다니. 의기양양하게 옷장을 뒤지다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오래된 옷더미 속에서 나온 건 아버지의 유품인 대한항공 트렌치코트였다. 이제 고인이 된 아버지는 대한항공 국제선 기장이었다. 아버지 덕분에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걸 어려서부터 배웠다. 아버지가 운항하는 노선이 바뀔 때마다 우리 집안 곳곳에는 어김없이 새 항로 그림이 붙었다. 아버지는 안전운항을 위해 밤낮으로 새 노선을 외웠다. 나는 대한항공 회장보다 대한항공 트렌치코트를 입은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대한항공은 고(故) 조중훈 전 회장이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넘겨받아 민영화한 대한항공공사(KNA)가 전신이다. 그래서 46세 대한항공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쌓여 있다. 한 지인은 1970년대 중동에 외화 벌러 가는 아버지를 환송할 때의 대한항공을 추억한다. 내 회사 동료는 베이징 특파원을 마치고 지난해 귀국하면서 일부러 대한항공을 탔다고 했다. 그게 도리인 것 같아서.

#3. 일본 호류지(法隆寺) 궁목수인 니시오카 쓰네카즈(1908∼1995)가 쓴 책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마음을 쏟아 넣지 못하는 건물은 아름답지도 않을 것이고, 오래 버티지도 못합니다. 그래서는 나무의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수많은 장인들의 마음을 짐작해 가며 하나로 통일해 가기 위해서는 대목장(大木匠)에게 장인들을 품는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장을 다녀보면 능숙한 자도 있고 서툰 자도 있습니다. 서툰 자도 훌륭한 목수로 키워 가려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대한항공을 함께 키워왔다는 국민의 마음이 큰 상처를 입었다. 대한항공 임직원들은 얼마나 허탈할 것인가. 만약 내 아버지의 코트에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은 또 어떨까.

대한항공 오너 일가에게 대목장의 따뜻함을 바란다. 진정한 반성을 쏟아 넣으면 일순간 시든 ‘대한항공 나무’에 새 생명이 돋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국민의 분노는 우리가 대한항공 태극마크에 기대해온 마음의 크기와 비례할 것이다. 그 마음을 되새기지 않으면 대한항공의 장수를 장담할 수 없다.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kimsunmi@donga.com
#물건#나가오카 겐메이#남상보 옹#장수.유품#아버지#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